2021년 옛 수협 어판장을 개조해 문을 연 군산 비어포트 안의 홍보 문구. 군산시 제공
은은한 보리 향이 솔솔 풍겼다. 면적 446㎡의 공간에는 파이프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파이프와 연결된 커다란 회색 원통에선 보리 싹에 물을 줘 맥아(엿기름)를 만든다고 했다. 이곳에선 1년에 맥아 125톤(보리 사용량 150톤)이 생산된다.
지난 13일 오전 11시께 찾은 전북 군산시 개정면에 있는 ‘군산 맥아 팩토리’. 이곳은 군산시가 2020년 지역에서 수확한 보리로 맥아를 만들려고 세운 공장이다. 이곳에서 생산된 맥아는 수제맥주를 만드는 군산 양조장 15곳으로 보내진다. 이선우 군산시 먹거리정책과 주무관은 “맥아 제조 장비가 국내에는 없어서 독일에서 수입해왔다. 저온저장고와 맥아 정선·포장 시설 등을 포함해 모두 60억원이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전북 군산시가 맥주 산업으로 명성을 키워가고 있다. 이웃한 전주가 ‘가맥’(가게에서 간단한 안주와 함께 파는 맥주)으로 떴다면, 군산은 지역농업과 연계된 ‘수제맥주’로 전주 가맥의 전국적 명성을 뛰어넘을 작정이다. 주목할 점은 맥주보리 재배에서 맥아 가공, 맥주 양조, 판매로 이어지는 수제맥주의 일괄 생산·판매 체계가 전부 안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역농업과 청년창업, 도시재생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주목할 만한 흐름도 만들어지고 있다.
군산의 수제맥주 산업은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부터 보리 수매가 중단되며 판로가 막히자 군산시는 보리 소비처 확대를 위해 수제맥주 시장에 주목했다. 맥주의 가장 중요한 원료는 보리 싹을 틔워 말린 ‘맥아’다. 문제는 국내의 170여개 수제맥주 업체 모두 맥아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군산시는 보리 농업의 활로를 ‘맥아의 국산화’에서 뚫어보기로 했다.
2019년 최상의 맥아 생산을 위해 군산의 기후와 토질에 맞는 맥주보리 품종을 선정했다. 다음 작업은 전용 재배단지를 만드는 것. 32㏊의 맥주보리 단지가 군산 지역에 들어섰는데, 올해는 면적이 35㏊(150톤 생산)로 늘었다. 재배 단계부터 품질을 관리하기 위해선 농업인 교육도 필요했다. 회현면에서 맥주보리를 재배하는 이길로(54)씨는 “재배 면적이 7㏊가량 되는데, 앞으로 수요가 늘면 새로운 소득 작목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전북 군산시 농업기술센터에 있는 맥아 제조공장 전경. 박임근 기자
원료 재배만으로는 큰돈이 안 되니, 수제맥주 생산으로까지 사업 영역을 확대하기로 했다. 지역의 청년들이 찾아와 10개월간 양조 기술을 배웠는데, 10명의 수료생 가운데 4명이 수제맥주 업체를 창업했다. 수료생들이 만들어 파는 제품은 라거맥주·흑맥주·밀맥주 등 18개 제품이다.
업체 ‘메인쿤브루잉’ 이정원 대표는 “일부에선 술을 만드는 일에 예산을 쓴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지역 농산물을 100% 활용하기에 오히려 농가와 지역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에서 들여온 맥아 제조 시설에 대해 군산시 담당자가 설명하고 있다. 박임근 기자
군산시는 생산에 이어 유통과 판매에도 공을 들였다. 도시재생사업 연계를 위해서였다. 옛도심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에서 1㎞가량 떨어진 군산 내항 ‘째보선창’의 옛 수협 어판장을 개조해 체험판매장을 마련했다. 4개 업체가 2021년 말 이곳에 입주해 공동양조장과 매장을 꾸렸다. 이곳엔 ‘비어포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째보선창은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이 되는 공간으로, 일제강점기 어항으로 개발돼 번영을 누렸고, 해방 이후 동부어판장으로 불렸으나 근해어업 환경이 바뀌면서 오랜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옛 수협 어판장을 개조해 2021년 12월 문을 연 군산 비어포트의 외부 전경. 박임근 기자
군산 비어포트 안의 양조장 시설에 대해 이선우 군산시 담당자가 설명하고 있다. 박임근 기자
비어포트가 생긴 뒤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외지 방문객이 많다. 이곳에서 ‘군산 수맥’을 경험한 이들은 “거품이 풍부하고 맥아 향이 진하다”고 입을 모은다. 판매관 직원 박성준(35)씨는 “4개 업체가 만든 다양한 수제맥주를 맛볼 수 있어 고객 만족도가 높다. 가격이 330㏄ 한잔에 5천~6천원으로 수도권에 비해 가격이 싼 편이어서 저녁이 되면 넓은 매장(826㎡)이 가득 찬다”고 말했다. 이선우 군산시 주무관은 “주말에는 주한미군 가족과 외국인 영어 강사들도 단골로 찾아온다. 비어포트가 불 꺼진 옛도심 도시재생의 마중물 구실을 하는 셈”이라고 했다.
제2회 ‘군산 수제맥주&블루스 페스티벌’ 포스터. 군산시 제공
지난해부터는 ‘군산 수제맥주&블루스 페스티벌’도 시작했다. 2회째를 맞는 올해 행사는 16일부터 18일까지 열리는데, 지난해에 견줘 행사 규모가 2배 가까이 커졌다. 관람석 규모가 지난해 2500석에서 5천석으로 늘었고, 맥주 추출기(4대→8대)와 음식 부스(18개→30개)도 증설했다.
축제를 준비하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주차장 행사장 모습. 군산시 제공
16일 개막식에서는 주한 미국대사관 관계자들도 참석해 군산 맥아로 만든 ‘한-미 동맹 70주년 기념 맥주’를 소개한다. 대만 내 교류도시인 신베이시의 수제맥주 업체 ‘타이완 헤드브루어스’도 참가해 수제맥주 2종을 선보인다. 군산시는 올해 행사에는 3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전국에서 몰려올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연도별 맥주보리 생산량 추이 통계청 자료. 2012년에는 정부의 보리 수매가 중단돼 생산이 줄었다가 보리 음료 등 수요가 커지면서 면적과 생산량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군산시 제공
박임근 기자
pik007@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