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대구 수성구 변호사 사무실 방화 사건 현장에서 정밀 감식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7명의 사망자를 낸 대구 변호사 사무실 방화 사건은 용의자가 흉기를 휘두르며 출구를 막는 바람에 피해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희생자 2명의 주검에는 칼에 찔린 상처가 있었고, 현장에선 범행에 쓰인 것으로 짐작되는 등산용 칼이 발견됐다.
사건을 수사 중인 대구경찰청은 10일 “현장 감식으로 확보한 연소 잔류물을 감정한 결과 휘발유 성분이 검출됐고, 불이 난 203호에서 유리 용기 등 4점을 추가로 확보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성분 감정을 의뢰했다”고 밝혔다.
앞서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날 길이가 11㎝인 등산용 칼 1점도 확보했다. 경찰은 숨진 김아무개 변호사와 사무장의 복부 등에서 날카로운 것에 찔린 흔적이 있는 것으로 미뤄 이 흉기가 범행에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했다. 경찰은 용의자 천아무개(53)씨의 주검이 출구 앞에서, 희생자들 주검은 사무실 안쪽에서 발견된 점으로 미뤄 천씨가 흉기를 휘둘러 직원들의 출구 접근을 막은 뒤 유리 용기에 담아온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날 경찰이 취재진에게 공개한 사건 현장은 건물 1층부터 시커먼 잿가루가 내려앉아 있었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창문이 모두 깨져 있었다. 2층 사무실 안쪽에선 불에 타지 않은 서류 더미가 보였다. 경찰은 불이 난 203호는 공개하지 않았다.
이번 방화 사건은 소송 패소로 재산 손실을 본 재건축 투자자 천씨의 보복 범행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왜 천씨가 분쟁을 벌이는 당사자가 아닌 소송 상대의 법률 대리인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경찰은 천씨가 애초 노렸던 배아무개 변호사와 소송 상대였던 시행사 대표 ㄱ씨 등을 조사하고 있다.
사건 당일 외지 출장을 나가 화를 면한 배 변호사는 이날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방화 용의자) 천씨는 재판정에서 얼굴을 본 것이 전부일 뿐, 직접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없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천씨가 제 의뢰인(재건축 사업 시행사 대표)에게 집착하는 바가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실제 천씨는 소송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생계가 어려워지자 시행사 대표 ㄱ씨에게 “돈을 갚으라”는 협박 문자와 함께 시너 통 사진을 전송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시행사 대표 ㄱ씨는 <한겨레>의 인터뷰 요청에 “지금 수사기관에서 조사받고 있다. 경황이 없어 지금은 따로 말씀드리기 어렵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10일 오후 3시30분 대구 중구 경북대병원 장례식장에 ‘법률사무소 방화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가 차려지고 있다. 이승욱 기자
용의자 천씨의 형은 언론과 한 통화에서 “동생이 4년간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 친지·지인들로부터 돈을 빌려 투자금을 마련했는데, 손실을 봤으니 소송을 해서라도 돌려받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이라며 “아무리 힘들었어도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되는 거였다”고 울먹였다.
천씨가 투자한 사업은 대구 수성구 범어동 신천시장에 지하 4층, 지상 15층 규모의 주상복합건물을 짓는 사업이다. 2005년부터 추진된 이 사업은 여러 차례 무산되는 등 진척이 없다가 2013년 새로 조합이 꾸려졌다. 이 과정에서 천씨는 시행사와 약정을 맺고 6억5000여만원을 투자했으나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하자 소송을 냈다. 건물은 지난해 준공됐지만, 오피스텔을 제외한 상가는 대부분 분양되지 않았다.
김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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