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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냉혹한 이야기의 효용

등록 2021-10-29 05:00수정 2021-11-01 16:53

[한겨레Book] 정아은의 책들 사이로

‘좋은 날이 되었네’
어쩌면 스무 번 l 편혜영 지음 l 문학동네(2021)

그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미용사인 어머니는 새 가위날을 시험하고 싶을 때면 그를 앉혀놓고 커트를 했고, 그는 시퍼런 가위날에 몸을 떨며 그 시간을 견뎠다. 시간이 흘러 그가 사회인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건물주가 되어 있었다. 그는 상당한 액수의 금액을 빚진 상태였다. 등록금 마련을 위해서, 그 후엔 젊은날 딱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를 잡기 위해 빚을 냈는데, 그 빚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당면한 경제적 어려움을 어머니에게 호소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 소유로 된 건물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언젠가 건물이 제 소유가 되리라 생각했기에, 빚에 짓눌린 현재를 견뎠다. 빚만큼 묵직한 다른 문제들도 말하지 않고 함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어머니가 사람을 찔렀다고 전해주는 전화를.

평생을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온 모자가 사실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고, 남은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을 치명적인 일에 직면했을 때 손톱만 한 도움도 줄 수 없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는 이 냉혹한 이야기는 편혜영의 소설집 <어쩌면 스무 번>에 수록된 짧은 단편 ‘좋은 날이 되었네’이다. 건조한 문체로 우리의 일상 저변에 도사린 부조리들을 사정없이 파헤쳐 보여주는 편혜영의 스타일이 유감없이 발휘된 이 작품을 읽고 있으면 몸이 움츠러든다. 음식점에 앉아 활기차게 이야기하는 사람들, 길을 걸어가며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현실성을 잃으면서 일군의 연극배우들처럼 보인다.

문명이 발달하고 자본의 힘이 세질수록 죽음과 광기와 존재의 고통은 가시권에서 사라진다. 우리의 감각을 둘러싸는 건 매끈하게 빛나는 상품과 환하게 웃는 얼굴, 말끔하게 정돈된 공간뿐이다. ‘비관적’이라 일컬어지는 문학작품들은 눈에 비치는 광경들이 위태위태하게 덮인 포장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넌지시 암시하거나, 아예 포장지를 벗겨버린다. ‘좋은 날이 되었네’는 후자에 속하는 작품이다. 편혜영이 쓰는 작품들이 대체로 그렇지만, 이 작품은 포장지 너머 존재하는 실체를 매정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들추어 보여준다.

이 작품이 소스라칠 정도로 차가운 느낌을 주는 건 그 내용물을 폭로하는 데 가족이라는 상징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지상에 남은 마지막 공동체라고 여겨지는 가족이 그런 고정관념의 반대급부로 무엇을 안아 들게 되는지를 거침없이 노출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노출을 통해 우리는 알게 된다. 한 인간 존재의 생존과 고통을 최전방에서 받아내야 한다고 지정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를 소외시킬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외로움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소설 속 모자는 의식주와 생존을 제외한 인간 정신의 수많은 다른 부분을 공유하지 못했다. 의식을 잃은 어머니의 병상 앞에서 주인공이 어린 시절 어머니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뒤늦게 하고 싶은 말을 떠올리는 마지막 장면은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소통의 중요성을 전해준다. 어쩌면 그것이 아들과 어머니가 서로를 이해하는 최초의 경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독자는 반사적으로 제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지나치게 염세적으로 보이는 문학작품의 존재 이유가 드러나는 건 바로 이런 순간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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