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이권우의 인문산책

오쓰카 노부카즈·강맑실 지음, 노수경 옮김 l 사계절(2021) 이제는 입에 자주 오르내리지 않지만, 한때 동아시아, 또는 동북아시아라는 말이 시끄러울 정도로 회자한 적이 있다. 그때 왜 동아시아여야만 하는가, 라는 고민을 한 적이 있다. 경제로 보면 동아시아 시장을 장악해야 한다는 관점이 있을 테고, 지정학적 관점에서는 군사적, 외교적 실리추구와 관련이 높을 테다. 이처럼 겉으로는 동아시아라는 공동체성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는 제 나라 잇속만 차리려는 관점에서 벗어나 이 문제를 새롭게 보게 한 책이 있으니, <서승의 동아시아 평화기행>(창비, 2011)이었다. 이 책을 보며 동아시아라는 말은 근대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된 국가의 연대라는 역사적 관점, 그리고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미래적 관점에서 써야 한다는 것을 통렬하게 깨달았다.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출판인 강맑실과 오쓰카 노부카즈의 편지글 모음인 <책의 길을 잇다>를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려다가 상당히 인상 깊은 구절을 앞부분부터 만났다. 일본을 대표하는 출판사 이와나미쇼텐의 대표를 지낸 오쓰카 노부카즈가 퇴직한 다음 한국에 세 차례에 걸쳐 여행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여행의 목적이 “예전에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행위의 잔재를 내 눈으로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단다. 그는 “인접한 두 작은 나라가 한쪽은 가해자로, 다른 한쪽은 피해자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가해자측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에게는 씻어낼 수 없는 무게”라고 토로했다. 상당히 진보적인 인물이라는 점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국가범죄를 두고 한 개인이 이토록 깊게 고민했다는 사실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가 도요타재단의 지원을 받아 2005년 동아시아출판인회의를 출범시킨 이유도 여기에 있을 성싶다. 아니나 다를까, 국내신문과 인터뷰한 내용이 실렸는데 “한국·중국·대만에 대한 속죄의식이 이 모임의 기본”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과문이나, 동아시아라는 말을 역사에 대한 속죄에 바탕을 둔 민간 차원의 지속적 교류라는 차원에서 쓴 드문 경우가 아닌가 싶다. 이 회의가 동아시아 6개 지역의 출판인이 우정을 나누고 연대하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국내 출판인이 동아시아 지역 출판물을 대상으로 한 국제 출판문화상인 파주북어워드를 제정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동아시아’ 정신 때문에 가능했던 듯싶다. 책은 동아시아출판인회의나 파주북어워드, 그리고 오쓰카 노부카즈의 책을 사계절에서 펴내며 오간 지극히 개인적인 편지를 모았다. 이 서신을 양국에서 책으로 펴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강맑실의 말처럼 동아시아 정치상황이 협력보다는 대결로 치닫더라도 민간의 교류가 이 긴장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을 테다. 오쓰카 노부카즈의 말대로 인류의 지적 유산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일이야말로 출판의 이상이라는 정신을 공유하고 싶어서였을 테다. 작은 바람을 보태자면, 이 정신을 다음 세대 출판인에게 어떻게 잇게 할 것이냐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다. 책을 보니, 일본측 발기인 가운데 한 분이 유명을 달리했다 한다. 환대와 연대, 그리고 역사의식의 공유와 전승만큼 소중한 게 어디 있겠는가.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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