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의 불편함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 지음, 김지현 옮김 l 비채 l 1만5800원
“앉아서 볼 수 있는 책이 아니다.” 2020년 인터내셔널 부커상 수상작 <그날 저녁의 불편함>을 두고 심사위원장 테드 호지킨슨이 한 말이다. 1991년생 네덜란드 작가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의 강렬한 데뷔를 축약한 한마디.
레이네펠트는 첫 소설로 부커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작가로 떠올랐다. 최연소(29살) 수상자라는 기록과 함께, 상실과 고통을 직시하는 가장 새로운, 본능적인 목소리 중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이 소설은 삶의 지독한 굽이를 다룬다. 가족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남겨진 이들의 붕괴를. 작가는 수상 소감에서 이 소설을 쓰는 6년간 책상 앞에 다음과 같이 써두었다고 했다. “가차 없이”.
2000년대 초반 네덜란드 시골의 한 낙농장을 배경으로 죽음의 잔해와 고군분투하는 아이 ‘야스’의 이야기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스케이트 탄다고 호수에 갔던 큰오빠 ‘맛히스’는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는다. 날씨가 풀려 약해진 얼음 틈으로 오빠가 가라앉았다.
“너희 형제가 죽었다.” 노크도 없이 집에 쳐들어온 동네 수의사 아저씨가 말했다. ‘나’(야스)는 아저씨에게서 눈을 돌려 “갈고리에 걸린 채 추위에 뻣뻣하게 굳어가는 수건들을 바라보았다.” 욕조물 속에서 그 얘기를 듣고는 나도 모르게 오줌을 눠버렸다. 여동생 ‘하나’는 아직 죽음이 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작은오빠 ‘오버’는 “눈물을 닦아내려 움직이는 자동차 앞유리 와이퍼처럼 고개를 왼쪽 오른쪽으로 까딱거리고 있었다”.
“나는 열 살이었고 더 이상 코트를 벗지 않았다.” 오빠가 죽은 뒤부터, 그날 입었던 빨간 코트를 벗을 수 없게 됐다. 봄에도, 여름에도 그 겨울 코트만 입는다. 어떤 상태도 변하지 않기를 원하는 욕구의 표면화였다. 불변과 지속의 욕구는 안으로도 분출됐다. 똥을 누지 않는 것이다. 배가 “쌍알”처럼 부풀고 “누가 가위로 배를 찌르는 것만 같다”. 그래도 “똥은 참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내가 간직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잃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 나 자신에게로 갈 거야. 내가 가고 싶은 장소는 오로지 나 자신뿐이니까.” 30살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는 자신을 성별 이분법을 벗어난 ‘논바이너리’로 인식하는 젠더퀴어 작가다. 이름을 ‘마리커’에서 ‘마리커 뤼카스’로 바꾸고 시와 소설을 쓴다. 첫 소설로 최연소 부커상 수상 작가가 되었다. EPA 연합뉴스
똥을 누지 않게 된 결정적 계기는 아빠의 거칠고 무신경한 말이 일으킨 충격이었다. 아빠와 외출하는 길에 갑자기 똥이 누고 싶어졌고, 아빠는 나를 가까운 숲에 들여보낸다. “캐러멜 소스 같은 설사가 풀에 튀는 것을 상상”하며 엉덩이에 힘을 주는데, 아빠가 이렇게 말하는 거다. “더 오래 걸리면 두더지가 네 똥구멍에 들어가서 굴을 팔 거다.”
나는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관에 누워 있던 맛히스 오빠의 항문에 간호사들이 솜뭉치를 넣어뒀다고 말해준 것도 아빠였다. “오빠가 땅에 묻혔을 때 두더지들이 오빠의 몸속으로 파고들리라는 것, 내 속에 있는 것도 전부 두더지들이 파헤치리라는 것이 상상되었다. 내 똥은 나에게 속했지만, 일단 풀밭에 떨어지고 나면 그것은 세상에 속했다.”
나는 밤이면 맛히스가 자던 모양대로 꺼진 침대 매트리스에서 잠을 자는데, 아빠는 그런 나를 끌어낸다. “오빠의 빈자리에서 빠져나오는 건 거기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걸 아빠는 이해해주지 못한다. 부모는 자식을 잃은 슬픔에 잠겨 휘청대고 있다. 맛히스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못하게 하고(그랬다가 코트째로 아이를 옷걸이에 걸기도 했다), 곡기를 끊은 엄마는 남은 자식을 돌볼 힘이 없다. 만져주긴커녕 우연히 피부가 스치지도 않으니까. “슬픔은 사람의 척추에까지 올라온다”는 걸 나는 알게 되었다. “엄마의 등이 점점 더 굽어”가는 걸 보면서.
바라는 건 이것뿐이다. 아이답게도 아빠, 엄마가 다가와 “나를 꽉 안아주기를”, 그래서 부모에게 “매달리고 싶은 갈망 속에 나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기를.” 그러나 “지금 내가 자신을 잃을 수 있는 곳은 상실 그 자체뿐이다.”
가족의 비극은 점점 더 큰 소용돌이를 그리며 휘몰아친다. 슬픔을 처리하지 못한 아이들이 머리를 찧으며 자해하고, “제물”이란 이름으로 폭력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작은 동물을 괴롭히고, 끝내 죽이기. 처음엔 토끼 수염을 자르고, 다음엔 드라이버로 달팽이를 분리하고, 그다음엔 강제로 짝짓기 시킨 작은 암토끼가 죽고, 급기야 직접 장도리로 닭을 내리친다. 사춘기가 되어 서로와 친구를 제물 삼아 성적으로 학대하기까지.
소설에는 감정을 세분화한 단어가 거의 안 보인다. 이것이 가족의 병든 내면을 우회적으로 표상한다. 불안해, 무서워, 절망스러워, 지쳐, 괴로워, 가슴이 아파, 좌절이야, 도와줘… 이런 대화가 없다. 감정에 이름이 없으니 길들일 수도 없다. “죽고 싶다”(엄마)는 말에 깃든 수많은 감정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풍부한 “시적 관점”(부커상 심사위원 테드 호지킨슨)으로 그 부재를 아프게 극복한다. 불안한 일상에서도 놀랍고 비범한 생의 비밀을 캐내는 관점 말이다. 허물어지는 가족 사이에서 “딸기의 질감”으로부터 뜻밖의 “안정”을 느끼는 아이의 순간 같은 것. “질감은 통일성을 자아낸다. 무너질 수도 있는 무언가를 한데 엮는 짜임새에서 질감이 나오는 것이니까.”
실제로 레이네펠트는 3살 때 12살이던 오빠를 사고로 잃었다. 그의 부모도 야스의 부모처럼 농장에서 소를 키웠고, 부모 집을 떠난 현재도 그는 글을 쓰며 소를 돌본다. 레이네펠트의 글쓰기는 시에서 출발했다. 24살에 첫 시집(<송아지의 털>)을 냈다. “무구하고, 예상하지 못한 지혜로 가득하며, 네덜란드 문학에서 접한 어떤 작품과도 다른 시”(영어판 번역가 새러 티머 하비)에는 <그날 저녁의 불편함>처럼 어린 날의 트라우마가 깊게 관통하고 있다.
레이네펠트는 “성별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며 스스로를 논바이너리로 인식하는 젠더퀴어 작가다. 19살에 자신의 이름을 ‘마리커’에서 ‘마리커 뤼카스’로 바꾸었다. 여자애 같지 않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 뒤였다. 어릴 적 상상 속 친구의 이름을 추가한 것이라고 한다.
석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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