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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혈연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관념, 민족

등록 2022-03-11 04:59수정 2022-03-11 09:08

[한겨레Book] 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

나는 오늘도 국경을 만들고 허문다: 국경도시 단둥을 읽는 문화인류학 가이드
강주원 지음 l 글항아리(2013)

거의 30년 전이던 1993년 6월6일, <문화방송>(MBC) 장학퀴즈 방송 1천회 특집으로 중국의 조선족 남녀 중학생들(우리 학제로는 고등학생에 해당)이 초대돼 퀴즈 대결을 벌였다. 이런 방송이 가능했던 것은 1992년 8월24일,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이상옥 당시 한국 외무장관과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이 한중수교를 맺은 덕분이었다. 올해로 한중수교 30주년이 되지만, 정식 외교절차를 맺기까지 중국은 ‘죽의 장막’ 뒤편의 중공이었고, 만주와 연해주의 조선족들은 만날 수 없는 적성국 동포였다. 내가 기억하는 한, 이것이 만주 벌판에서 말 달리며 독립운동을 했다는 역사 속 후예들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날의 방송은 여러 측면에서 민족 동질성을 확인하는 훈훈한 분위기였지만, 동시에 내게 ‘민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였다. 아나운서가 퀴즈를 내며 ‘우리나라(대한민국)’라고 했는데,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조선족 학생은 그 ‘우리나라’를 ‘중국’으로 듣고 답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당연히 ‘대한민국’이란 등식에 갇혀 있던 내게 그 답변은 충격이었다. 단일민족 신화에 따라 민족 개념을 오랫동안 혈연적 관념으로 파악해 왔고, 이 관념은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우리 일상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번역의 근대를 살면서 번역할 수 없는, 번역하기 어려운 서구의 개념을 우리말로 번역해 왔지만, 그중에서도 어려운 말이 단순하게 ‘민족주의’로 옮길 수 없는 ‘내셔널리즘’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혈연 중심의 민족주의 개념으로는 복잡한 국경선 이동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서구 유럽의 내셔널리즘과 미국처럼 이주민으로 구성된 국가의 내셔널리즘을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대만 독립이나 홍콩 문제를 이해하기는 더욱 어렵다. ‘내셔널리즘’이란 역사·지리·문화·정치적 전통을 공유하는 하나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어떤 개인의 생각 또는 감각을 의미한다. 근대민족국가에서 ‘시민과 평등’이 중요한 이유는 신분과 계급, 지역과 가문을 넘어 한 국가의 ‘균질적인 국민’이란 의식, 즉 내셔널리즘을 창출하기 위한 핵심전략이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줄곧 한반도에서 함께 살아온 이들에게 이 감각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미국처럼 새로운 땅에서 시작한 국가, 유럽처럼 국경과 국적이 혼재된 지역,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역사를 통한 분단과 이산으로 별도의 역사와 삶(정체성)을 구성하며 살아왔던 특정한 개인으로 하여금 나라와 정부, 체제를 수호하며 목숨까지 희생하도록 요구하는 내셔널리즘을 재구성하기 위해선 특별한 ‘국가 만들기’ 과정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한복을 입고 나온 조선족을 두고 여러 논란이 빚어졌다. 우리의 눈높이로 중국에 대해 분노하기에 앞서 과연 우리는 조선족을, 또 다른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북한 사람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문화인류학자 강주원 선생은 오랫동안 중국 단둥을 오가며 남과 북, 조선족과 탈북민의 삶을 관찰하고 통일(민족국가건설)에 대한 고민을 업으로 삼아 <나는 오늘도 국경을 만들고 허문다>라는 책을 썼다. 국경도시 단둥에서는 지금도 중국·조선·남한·북한이 매일 서로의 국경(네이션)의 경계를 만들고, 허물며 만나고 있다. 물론 조선족과 남한 사람, 북한 사람은 한국어를 통해 때로 민족정체성을 공유하지만, 이들 각자에겐 그들의 국적과 내셔널리즘이 없을까?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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