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자살현상에서 구상 상담사이트에 상상 넘는 사례들
‘싸구려 소설’ 편견 바꾸려 작가 발굴·인터넷 카페 열어 교류
‘싸구려 소설’ 편견 바꾸려 작가 발굴·인터넷 카페 열어 교류
인터뷰/장편 공포소설 <이프> 쓴 이종호씨
베스트셀러 작가 이선우는 해변 고급 호텔에서 작품을 쓰고 있다. 한달 동안 가족과 연락도 끊고 몰두하는 터다. 한 여인이 투신자살하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스벵가리의 선물’이란 이름으로 그에게 배달된다. 이어 그가 믿는 현실엔 금이 가기 시작한다. 선우의 아내는 그가 사채를 쓰고 가족을 버린 채 도망쳤다고 질책한다. 통장 잔고는 텅 비어있고 그가 썼다고 생각했던 소설들은 온데간데 없다. 그리고 투신자살한 장면 속 여인이 그에게 전화해 묻는다. “내가 죽었나요? …다음 차례는 당신이에요.”
<분신사바> 등을 쓴 작가 이종호(42)의 새 소설 <이프>는 묻는다. 당신이 현실이라고 믿는 게 진짜인가? 당신은 씁쓸한 진실을 대면할 것인가? 무지한 평온을 누릴 것인가? 귀신이 등장하거나 목 뒤를 낚아채는 ‘깜짝쇼’는 없다. 공포는 묵직한 질문을 끝끝내 밀어붙이는 탄탄한 구성에 똬리를 틀고 있다. 현실과 가상, 기억과 망상, 주체의 의지와 타인의 강요 사이 경계가 허물어진 틈을 타고 두려움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치밀한 공포를 짜내는 이종호를 지난 9일 만났다.
“<이프>는 3~4년 전에 구상하게 됐어요. 아이엠에프 끝날 때쯤인데 자살사이트가 한참 기승을 부릴 때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외롭고 아픈 사연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행복해질수록 불안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커지는 삶의 아이러니도 담으려 했죠.” ‘스벵가리의 편지’를 받게 되는 인물들은 경제적 궁핍, 외모컴플렉스와 지독한 짝사랑, 아버지의 심한 폭력, 학업 스트레스, 에이즈 감염 따위로 고통 받는다. 그리고 자살 아닌 자살을 감행하기 직전 마지막 한달 동안 꿈결 같은 행복을 맛본다. “여러 상담 사이트를 뒤졌어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사연이 많더군요. 공포소설의 힘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진실의 단면을 드러내는 데 있죠.” 그래서 <이프>는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어두운 그늘과 부서질 듯 위태로운 주체를 기둥 삼았다.
“인간 본성을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느낌이 좋았죠.” 이종호 작가가 공포소설에 애착을 갖는 까닭이다. 그 매력에 걸려들어 방송프로덕션 피디로 다큐멘터리를 만들다 전업작가가 됐다. “연인의 사랑, 부모·자식 간의 관계도 조금만 선을 넘고 비틀면 공포가 보여요. 또 공포소설로 금기의 영역으로도 들어갈 수 있어요.”
사회적 문제에서 섬뜩함을 끌어내는 재주를 지닌 그는 꽤 성공적인 길을 걸어왔다. <분신사바>는 영화로 만들어진 데 이어 일본에서도 출간됐다. 전작인 <흉가>와 <이프>, 그가 아직 탈고하지 않은 <붉은 기와 집>까지 영화제작 판권이 팔렸다. “책은 잘 안 나가요. 인터넷에서 공짜로 보는 싸구려 소설이라는 인식이 강하죠.”
이런 편견을 바꿔보려고 그는 2~3년전부터 온라인에 올라오는 글을 뒤져 재능 있는 작가 9명을 찾아내고 ‘매드클럽’을 만들었다. 이들의 작품을 담은 단편집 <한국 공포 단편 걸작선>을 이달 말께 펴낼 계획이다. 지난 4월 인터넷에 ‘유령공포문학카페’도 열어 마니아들끼리 정보를 나눌 놀이 마당을 마련했다. 공포작가협회, 전문잡지를 꾸리려고 준비중이다. “괴담이 줄거리를 중심으로 살얼음같이 잠깐 동안 무섭게 하는 거라면 공포소설은 인물을 살리고 사회적 메시지를 실어 마음 속에 있는 큰 얼음덩어리를 건드리는 거죠.”
이런 구절은 <이프>가 자아내는 공포의 고갱이와 공포소설의 본질을 짚어내는 듯하다. “37층에서 바라보는 도심 풍경은 꿈속의 그것처럼 늘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때론 그 비현실성이 진실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땅에 발을 딛는 순간 사람들은 더 이상 합리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 시야에 들어오는 사물은 극히 한정되고 사람들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모든 가치판단을 해야만 한다. 덕분에 그들은 제각각 왜곡되고 과장된 잣대를 들이대며 저마다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글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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