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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삶이란 한갓 농담 혹은 하찮은 퍼즐

등록 2006-11-24 17:36

서하진 다섯번째 소설집 ‘요트’
어둡고 막막한 생의 진실 그려

1994년 등단 이래 꾸준히 작품을 내놓고 있는 서하진(46)씨가 다섯 번째 소설집 <요트>(문학동네)를 묶어 냈다.

표제작을 비롯해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경쾌한 제목 및 표지와는 달리 소설집에 담긴 이야기들은 대체로 어둡고 답답하다. 표제작의 요트란 물론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는 자유와 일탈을 상징한다. 주인공의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요트를 사서 세계 일주에 나서겠노라는 계획을 밝히는데, 이것이 주인공에게는 일대 재앙으로 다가온다. 남편으로서는 억눌렸던 욕망의 분출이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겠지만, 생활인인 아내의 처지에서 보면 어렵게 장만한 강남의 알짜배기 아파트를 팔고 강북으로 이사해야 하는 힘든 선택을 강요당하는 셈인 것. 설상가상으로 모범생이던 고3 수험생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집을 나간다. 아들은 아들대로 시험 공부에 따른 스트레스를 그런 식으로 분출한 것이었을 텐데, 그나마 현실 감각을 지니고 집안을 건사해야 하는 주인공의 고통은 따로 해소할 데가 없다.

소설집 <요트>는 이처럼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일상의 이면에 음험하게 도사린 위기와 재앙을 들춰낸다. <비망록(備忘錄), 비망록(悲忘錄)>에서 대학생 아들을 둔 멀쩡한 의사 아버지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의 환자이기도 했던 옆집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집을 나가고, 죽어가는 어머니의 마지막 호소에도 아랑곳없이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아버지는 자신을 대신해서 옆집 여자와의 연애 일기를 부쳐오는데, 그 일기로써도 분명해지는 것은 없다.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고 허공을 밟듯 살아가던 옆집 여자를 향한 측은한 마음이 어느 순간 사랑으로 발전했으며,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오래 전에 모종의, 어머니 쪽에서 미안해할 만한 일이 있었다는 암시 정도뿐. 일상은 발 앞에서 갑자기 갈라지는 땅처럼 문득 균열을 드러냈다가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입을 다물어 버린다.

<비망록, 비망록>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향해 “내게 왜 이러는 거예요?”(85쪽) 질문한다. <농담>에서도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공부를 다시 하겠다는 희수를 향해 남편은 “왜?”(101쪽)라는 질문을 던진다. 두 경우 모두 딱부러지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사실은 질문을 받은 사태의 당사자 역시 그에 대한 답을 잘 모르고 있기 십상이다. 삶이란 그만큼 설명하기 힘든 수수께끼와 미스터리 덩어리인 법.

<농담>에서 그야말로 농담처럼 결행한 아내의 퇴직은 “우리, 이혼하자”(103쪽)라는 남편의 반응을 끌어내며 두 사람 사이의 잔인한 파워 게임으로 치닫는다. “희수는 자신이 슬프고 우습고 무서운 꿈 한가운데 있음을 알았다.”(133쪽) 아예 <꿈>이라는 제목을 단 단편의 주인공 역시 “나는 쉽사리 깨어날 수 없는 길고 어지러운 꿈에 빠졌다는 것을”(177쪽) 알게 된다. 이어지는 <퍼즐>이라는 작품까지 가세하면, 서하진 소설의 인물들에게 삶이란 한갓 농담이요 꿈인가 하면 하찮은 퍼즐에 지나지 않는 것만 같다. 대부분의 소설 결말부에서 주인공들은 모종의 선택 내지는 결정을 요구받고 그 앞에서 망설이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그들을 통해 작가는 어둡고 막막한 생의 진실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 같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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