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청갈색책〉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그린비
남경태의 책 속 이슈 / 비트겐슈타인의
<청갈색책〉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그린비 철학은 수학이나 과학과 달라서 똑 부러지는 정답이 없다. 수학에서는 “5+7=12”로 문제와 답이 끝나지만 철학에서는 왜 5+7이 12냐고 따진다. 과학에서는 하늘이 파란 이유를 파장이 짧은 파란색 빛이 대기 중에 가장 많이 산란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철학은 하늘을 파란색으로 인식하는 근거가 뭔지를 묻는다. 이렇게 까칠한 철학에서 똑 부러지는 ‘정답’을 내놓으려 한 철학자가 있다. 수줍은 외모에 강렬한 카리스마를 숨기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간 분석철학의 태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이다. 그는 전통 철학의 형이상학적 논제들이 근거에서부터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진리란 무엇인가?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이런 의문들은 애초부터 답을 낼 수 없는 잘못된 질문이었다. 답이 없다는 게 바로 ‘똑 부러지는 정답’이었던 셈이다. 전통 철학이 잘못된 질문에 몰두한 이유는 언어가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청갈색책〉(진중권 옮김)에서 그는 놀랍게도 언어란 소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고 말한다(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강의를 받아 적어 두 권의 등사본을 만들게 했는데, 그 표지가 청색과 갈색이었던 탓에 이런 제목이 붙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 의사를 전달할까? 언어가 올바른 소통의 수단이 되려면 언어를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똑같은 관념을 가진다고 가정해야 한다. 하지만 상식적으로는 그럴듯해도 실제로 그렇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언어와 지시 대상(예컨대 ‘책’이라는 언어와 실제의 책)의 관계는 막연히 대응하리라고 ‘가정’할 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곤충학자가 메뚜기에게 “뛰어라” 하고 말했더니 펄쩍 뛰었다. 메뚜기의 뒷다리를 자른 뒤 “뛰어라” 하고 말했더니 이번에는 뛰지 않았다. 학자는 보고서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관찰 결과 메뚜기의 청각기관은 뒷다리에 있음이 밝혀졌음.” 뒷다리와 청각기관은 일치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전혀 무관하다. 언어를 통한 우리의 인식은 이렇게 늘 헛다리를 짚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언어적 소통은 순전히 우연일까? 그렇지는 않다. 언어가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언어 자체에 언어의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언어의 의미는 언어 자체에서 찾아지는 게 아니라 언어를 둘러싼 맥락, 언어의 용도에 의해 결정된다. 언어가 소통의 수단이라는 것을 상식으로 믿으면 낭패하기 십상이다. “솔직히 말하면 용서해줄게”라는 말에는 실상 “진실을 알고 나면 너는 내 손에 죽을 줄 알라”는 맥락이 숨겨져 있다. “자유롭게 자신의 주장을 밝혀라”는 논술 문제를 순진하게 믿고 정말 마음대로 썼다가는 점수를 포기해야 한다. 모든 언어의 배경에는 언표된 내용을 통제하는 규칙이 있다. 이것이 곧 언어의 용도다.
“기호의 생명을 이루는 그 어떤 것을 명명해야 한다면, 우리는 바로 그 기호의 사용법이 그것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청갈색책〉의 이 문구는 이 책 자체에도 통용된다. 이 책의 생명은 독자의 용도에 있을 테니까.
남경태/번역가·저술가
<청갈색책〉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그린비 철학은 수학이나 과학과 달라서 똑 부러지는 정답이 없다. 수학에서는 “5+7=12”로 문제와 답이 끝나지만 철학에서는 왜 5+7이 12냐고 따진다. 과학에서는 하늘이 파란 이유를 파장이 짧은 파란색 빛이 대기 중에 가장 많이 산란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철학은 하늘을 파란색으로 인식하는 근거가 뭔지를 묻는다. 이렇게 까칠한 철학에서 똑 부러지는 ‘정답’을 내놓으려 한 철학자가 있다. 수줍은 외모에 강렬한 카리스마를 숨기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간 분석철학의 태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이다. 그는 전통 철학의 형이상학적 논제들이 근거에서부터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진리란 무엇인가?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이런 의문들은 애초부터 답을 낼 수 없는 잘못된 질문이었다. 답이 없다는 게 바로 ‘똑 부러지는 정답’이었던 셈이다. 전통 철학이 잘못된 질문에 몰두한 이유는 언어가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청갈색책〉(진중권 옮김)에서 그는 놀랍게도 언어란 소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고 말한다(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강의를 받아 적어 두 권의 등사본을 만들게 했는데, 그 표지가 청색과 갈색이었던 탓에 이런 제목이 붙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 의사를 전달할까? 언어가 올바른 소통의 수단이 되려면 언어를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똑같은 관념을 가진다고 가정해야 한다. 하지만 상식적으로는 그럴듯해도 실제로 그렇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언어와 지시 대상(예컨대 ‘책’이라는 언어와 실제의 책)의 관계는 막연히 대응하리라고 ‘가정’할 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곤충학자가 메뚜기에게 “뛰어라” 하고 말했더니 펄쩍 뛰었다. 메뚜기의 뒷다리를 자른 뒤 “뛰어라” 하고 말했더니 이번에는 뛰지 않았다. 학자는 보고서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관찰 결과 메뚜기의 청각기관은 뒷다리에 있음이 밝혀졌음.” 뒷다리와 청각기관은 일치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전혀 무관하다. 언어를 통한 우리의 인식은 이렇게 늘 헛다리를 짚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언어적 소통은 순전히 우연일까? 그렇지는 않다. 언어가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언어 자체에 언어의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남경태/번역가·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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