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한겨레 연재 묶어내
여전히 활력 넘치는 필치로
설화 바탕 21세기 희망 제시
여전히 활력 넘치는 필치로
설화 바탕 21세기 희망 제시
올 연초부터 반년 가까이 <한겨레>에 연재됐던 황석영(64)씨의 소설 <바리데기>가 책으로 묶여 나왔다. 창비 펴냄. 1만원.
<바리데기>는 작가가 98년 출옥한 이후 <오래된 정원>(2000) <손님>(2001) <심청, 연꽃의 길>(2003)에 이어 10년 만에 네 번째로 내놓은 소설이다. 또래의 동료 작가들이 사실상 절필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전성기에 비해 한결 느슨해진 필치로 주저앉은 반면 황씨의 60대는 오히려 젊은 시절을 능가하는 활력으로 차지고 풍성하다.
<바리데기>는 식량난이 극심하던 무렵 북한을 탈출한 소녀 ‘바리’를 통해 북녘 동포들이 겪는 고통을 가감없이 응시하는 한편, 바리를 중국을 거쳐 영국 런던 변두리로 보내 그곳에 모여든 제3세계 출신 이민 노동자들의 애환 역시 들춰낸다. 특히 21세기 벽두 지구촌을 뒤흔든 9·11 테러와 이라크전쟁의 소용돌이가 성인이 된 바리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도록 함으로써 한반도의 현실에서 출발한 서사가 전 세계적 맥락을 지닐 수 있도록 했다.
제목에서 짐작되다시피 <바리데기>는 전통설화 ‘바리데기 이야기’의 구조를 차용했다. 설화에서 오귀대왕의 일곱째 공주로 태어났다가 버려진 바리는 병든 부모의 약을 구하고자 저세상까지 가서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영약(생명수)을 구해 죽은 부모를 살리는 것으로 그려진다. 소설 <바리데기>에서 주인공 바리는 북녘 도시 청진의 지방 관료의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나 버려졌다가는 곧 되돌아오며, 죽은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직접 경험하지 않은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보는 등 신통력을 지니게 된다.
바리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영약을 구하기 위한 시련을 겪는 설화의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 중국을 떠나 유럽으로 향하는 화물선 컨테이너 안의 지옥도를 환상적인 필치로 그린 제6장(129~143쪽), 그리고 무슬림인 남편을 빼앗기고 딸도 잃은 바리가 보름 가까이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환상 속에서 원혼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마지막 12장(264~285쪽)으로 변주되며 충격과 감동을 아울러 선사한다.
바리는 식량난과 탈북 러시 속에서 잃어버린 부모를 되찾지는 못한다. 부모를 찾기는커녕 제가 낳은 사랑스러운 딸을 사고로 잃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던져지는 가혹한 질문들과 요구들(“말 좀 해봐, 우리가 받은 고통은 무엇 때문인지” “어째서 악한 것이 세상에서 승리하는지” “우리의 죽음의 의미를 말해보라!”)에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답한다. 욕망을 버려야 하며, 이승의 정의란 반쪽짜리 불완전한 것일 뿐이고, 남을 향한 미움에서 풀려나야 스스로도 자유로워진다고. 그 답은 비록 불충분하고 심지어 못마땅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분명 바리가 구해 온 21세기의 생명수라 해야 할 것이다. 생명수를 구하지 못했노라 말하는 바리에게 시할아버지인 압둘은 이렇게 말한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286쪽)
희망과 눈물이 곧 생명수라는 말씀이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황석영 소설 ‘바리데기’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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