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냐민 선집 마무리 단계 최성만 교수
인터뷰 / 베냐민 선집 마무리 단계 최성만 교수
베냐민 전공자들 번역으론 처음
그동안 관련서적 영어중역이 대부분
독일철학 경원하는 풍조 안타까워 10여년 전에 기획된 이래 오래 소문으로 떠돌던 발터 베냐민(1892~1940) 선집 번역이 마침내 완료단계에 들어섰다. 예정된 총 10권 가운데 우선 <일방통행로>와 <사유 이미지>를 담은 제1권,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외>의 2권,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가 담긴 3권이 도서출판 길에서 나왔다. 이번 번역작업을 이끈 최성만(51)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는 6일 “지난 1년 반 동안 함께 공부하면서 토론하고 번역해온 것 가운데 추가로 3권을 이달 말까지 내고 내년 말까지는 번역을 모두 완료해 10권으로 완간한다”며 그 동안의 노고가 밴 초고들을 학교 연구실 서가에서 뽑아와 보여주었다. 최 교수에 따르면, ‘68학생운동’ 이후 다시 발굴돼 주목받기 시작한 베냐민은 “서구에서는 이미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며 ‘베냐민 르네상스’ ‘베냐민 붐’이 일 정도로 폭발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유대계 독일 철학자 베냐민은 “초현실주의적 모더니스트이자 포스트모더니즘적 모티프들을 선취”한 “좌파 아웃사이더”였고, “문화연구·매체이론·미학·문화인류학·탈식민주의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사상적 단초들을 풍부하게 제공한 사상가”였다. 그가 다룬 주제나 모티프들은 전방위적이어서 철학·문예학·예술·미학·사회학·정치학·심리학·인류학 등 인문사회과학의 전분야에 걸쳐 있다. 파시즘과 세계대전의 광기에 사로잡힌 유럽을 탈출하려다 실패하자 단행한 베냐민의 자살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늦었지만 한국에서도 10년 전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이란 번역서가 나온 이래 오랫동안 뜸하다가 그의 미완의 주저인 <아케이드 프로젝트>(파사주), 그에 대한 연구서인 수전 벅 모스의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등이 번역됐다. 베냐민이 교수자격 취득을 위해 쓴 논문 <독일 비극의 원천>이나 <독일 낭만주의 비평> 등도 조만간 번역, 출간될 예정이고 최 교수는 그 중심에 있다. 현대도시 길거리를 걸어가며 마주치는 주유소·간판·식당·벽보·쇼윈도 등을 매개로 현실과 초현실세계의 다양한 경험들에 대한 아포리즘적이고 이미지적인 성찰 60편을 묶은 <일방통행로> 등 선집 10권에 담은 글들은 에세이들이다. 선집 발간은 “베냐민 연구를 위한 기본 텍스트들의 번역이 완료된다”는 의미를 지닌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번 선집이 “베냐민 전공자들에 의한 최초의 번역”이라는 점이다. “희한하게도” 지금까지 이 땅에서 베냐민 번역을 맡아온 사람들은 베냐민 전공자들이 아니었다. 전공자들의 번역작업이 늦어진 이유는 “1차적으로 전공자들 책임이 크다.” “변명을 하자면 요즘은 그래도 베냐민 전공자들이 국내에도 늘고 있는 추세지만 여전히 연구층이 엷은 편이고, 또 베냐민이나 그와 사상적으로 교류했던 아도르노도 마찬가지지만 사상체계가 촘촘하고 텍스트가 난해할 뿐 아니라 그 언어가 어떤 다른 작가들에 비하더라도 고도로 압축돼 있어 번역하기가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번역이 학문적 실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풍토 탓도 있다. “번역 하나 할 에너지로 논문 서너 편 쓰는 게 훨씬 낫다. 그 편이 돈도 더 받을 수 있고 연구우수교수로 낙점받기 위한 점수 따기에도 훨씬 유리하다.”
이제까지 베냐민 관련 서적 번역은 주로 영미권을 거친 중역이었다. 중역과 오역의 폐해를 최소화한 “표준적 번역을 제시한다”는 자신감이 밴 게 이번 선집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엔 포스트모더니즘에 천착한 프랑스 쪽 사상의 영향이 컸고 나름대로 좋은 구실을 했다. 문제는 편식 또는 독식이다.” 이번 선집 번역은 “편식을 깨고 균형을 잡는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의미도 있다고 최 교수는 말했다. 그는 “‘베냐민과 비트겐슈타인’ 조합이 지닌 폭발력은 ‘들뢰즈 또는 데리다와 푸코’ 조합을 능가할 수 있다”며 프랑스에도 큰 영향을 끼친 니체·하이데거· 후설·프랑크푸르트학파 등이 포진한 독일 쪽 사조가 경원당하고 있는 이 땅의 지적 편향을 지적했다. “영미, 특히 미국 편향이 너무 심하다. 독문학을 해와서는 여기선 자리 얻기 힘든다.” 영문과니 독문과니로 가르는 분과학문체제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데다 거기에 편승해 분과간 또는 분과내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탈정치적 부르주아 학문 귀족들’의 패권주의 폐해가 최 교수를 우울하게 만든다. 서울대 대학원 시절부터 베를린 유학시절까지 함께 베냐민을 공부한 이번 선집 공역자인 윤미애· 김영옥씨는 아직도 제대로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한 최 교수는 대학원 때 독문학으로 바꿨고 1984~95년 베를린자유대학 유학시절엔 철학에 몰두했으며 베냐민의 미메시스론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땄다. 왜 베냐민인가? “학부시절부터 니체와 괴테, 카프카에 기울어 그때 별명이 ‘(니체 아닌) 최체’였다. 시도 쓰고 기타도 치는 ‘문학소년’이었지만 사상이나 철학 쪽에 몰두했고 학부생활은 엉망이었다. 석사 때 베냐민으로 전공을 정했는데, 민주화의 ‘봄’과 좌절이 교차했던 당시 서구 좌파이론을 우리 현실에 접맥해 사회변혁을 꾀하는 움직임들이 있었고 헤겔이나 루카치가 유행했다. 루카치를 전공한 반성완, 문학사회학 강좌를 연 천기태 교수 등의 영향이 컸다.” 인문학 분야가 본디 그렇듯 베냐민 연구가 당장 고부가가치를 낳는 건 아니다. 충실한 연구와 토론이 이뤄지고 그걸 토대로 한 이론과 실천의 상호작용을 거쳐 사회의 지적 역량이 커지고 깊어간다. “학문이 결실을 맺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제대로 된 번역은 그 출발점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그동안 관련서적 영어중역이 대부분
독일철학 경원하는 풍조 안타까워 10여년 전에 기획된 이래 오래 소문으로 떠돌던 발터 베냐민(1892~1940) 선집 번역이 마침내 완료단계에 들어섰다. 예정된 총 10권 가운데 우선 <일방통행로>와 <사유 이미지>를 담은 제1권,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외>의 2권,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가 담긴 3권이 도서출판 길에서 나왔다. 이번 번역작업을 이끈 최성만(51)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는 6일 “지난 1년 반 동안 함께 공부하면서 토론하고 번역해온 것 가운데 추가로 3권을 이달 말까지 내고 내년 말까지는 번역을 모두 완료해 10권으로 완간한다”며 그 동안의 노고가 밴 초고들을 학교 연구실 서가에서 뽑아와 보여주었다. 최 교수에 따르면, ‘68학생운동’ 이후 다시 발굴돼 주목받기 시작한 베냐민은 “서구에서는 이미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며 ‘베냐민 르네상스’ ‘베냐민 붐’이 일 정도로 폭발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유대계 독일 철학자 베냐민은 “초현실주의적 모더니스트이자 포스트모더니즘적 모티프들을 선취”한 “좌파 아웃사이더”였고, “문화연구·매체이론·미학·문화인류학·탈식민주의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사상적 단초들을 풍부하게 제공한 사상가”였다. 그가 다룬 주제나 모티프들은 전방위적이어서 철학·문예학·예술·미학·사회학·정치학·심리학·인류학 등 인문사회과학의 전분야에 걸쳐 있다. 파시즘과 세계대전의 광기에 사로잡힌 유럽을 탈출하려다 실패하자 단행한 베냐민의 자살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늦었지만 한국에서도 10년 전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이란 번역서가 나온 이래 오랫동안 뜸하다가 그의 미완의 주저인 <아케이드 프로젝트>(파사주), 그에 대한 연구서인 수전 벅 모스의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등이 번역됐다. 베냐민이 교수자격 취득을 위해 쓴 논문 <독일 비극의 원천>이나 <독일 낭만주의 비평> 등도 조만간 번역, 출간될 예정이고 최 교수는 그 중심에 있다. 현대도시 길거리를 걸어가며 마주치는 주유소·간판·식당·벽보·쇼윈도 등을 매개로 현실과 초현실세계의 다양한 경험들에 대한 아포리즘적이고 이미지적인 성찰 60편을 묶은 <일방통행로> 등 선집 10권에 담은 글들은 에세이들이다. 선집 발간은 “베냐민 연구를 위한 기본 텍스트들의 번역이 완료된다”는 의미를 지닌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번 선집이 “베냐민 전공자들에 의한 최초의 번역”이라는 점이다. “희한하게도” 지금까지 이 땅에서 베냐민 번역을 맡아온 사람들은 베냐민 전공자들이 아니었다. 전공자들의 번역작업이 늦어진 이유는 “1차적으로 전공자들 책임이 크다.” “변명을 하자면 요즘은 그래도 베냐민 전공자들이 국내에도 늘고 있는 추세지만 여전히 연구층이 엷은 편이고, 또 베냐민이나 그와 사상적으로 교류했던 아도르노도 마찬가지지만 사상체계가 촘촘하고 텍스트가 난해할 뿐 아니라 그 언어가 어떤 다른 작가들에 비하더라도 고도로 압축돼 있어 번역하기가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번역이 학문적 실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풍토 탓도 있다. “번역 하나 할 에너지로 논문 서너 편 쓰는 게 훨씬 낫다. 그 편이 돈도 더 받을 수 있고 연구우수교수로 낙점받기 위한 점수 따기에도 훨씬 유리하다.”
“베냐민 번역, 학계 미국 편식 깰 토대됐으면”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한 최 교수는 대학원 때 독문학으로 바꿨고 1984~95년 베를린자유대학 유학시절엔 철학에 몰두했으며 베냐민의 미메시스론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땄다. 왜 베냐민인가? “학부시절부터 니체와 괴테, 카프카에 기울어 그때 별명이 ‘(니체 아닌) 최체’였다. 시도 쓰고 기타도 치는 ‘문학소년’이었지만 사상이나 철학 쪽에 몰두했고 학부생활은 엉망이었다. 석사 때 베냐민으로 전공을 정했는데, 민주화의 ‘봄’과 좌절이 교차했던 당시 서구 좌파이론을 우리 현실에 접맥해 사회변혁을 꾀하는 움직임들이 있었고 헤겔이나 루카치가 유행했다. 루카치를 전공한 반성완, 문학사회학 강좌를 연 천기태 교수 등의 영향이 컸다.” 인문학 분야가 본디 그렇듯 베냐민 연구가 당장 고부가가치를 낳는 건 아니다. 충실한 연구와 토론이 이뤄지고 그걸 토대로 한 이론과 실천의 상호작용을 거쳐 사회의 지적 역량이 커지고 깊어간다. “학문이 결실을 맺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제대로 된 번역은 그 출발점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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