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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백철 연구는 백철론 아니라 김윤식론”

등록 2008-02-12 21:39

김윤식 교수
김윤식 교수
평론가 백철 전기비평서 낸 김윤식 교수
“흔히들 말하길 ‘백철처럼 글 많이 쓴 사람 없고, 백철처럼 알맹이 없는 글 쓴 사람도 드물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막상 백철이란 인물을 파고들어가 보니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알겠습디다. 지금 한국에서 문학평론 하는 사람들, 그리고 대학에서 문학 가르치는 사람들 치고 백철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백철은 그 누구보다 민첩한 평론가였고, 무엇보다 국어학과 고전문학으로 양분되었던 대학 국문학과에 현대문학을 처음으로 도입해 오늘의 삼분할 편제를 만든 장본인입니다.”

국문과 편제 기틀 닦은 선구자지만
신사조 열광 지나쳤던 ‘웰컴주의자’
양면적 평가 속에 자신의 모습 투영

국문학자 겸 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가 선배 국문학자이자 평론가인 백철(1908~1985)의 생애와 업적을 천착한 전기 비평서 <백철 연구>(소명출판)를 내놓았다. 고은 시인과 더불어 문단의 양대 다작가로 꼽히는 김 교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제까지 쓴 책이 120권은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로 탄생 100년을 맞은 백철은 <문학개론>(1947)과 <신문학사조사>(1948~9)를 쓴 문학 이론가이자 문학사가이며 열정적으로 당대의 작품을 읽고 평을 쓴 현장비평가였다. 도쿄 유학 시절에는 나프(일본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담해 활동했으나 식민통치 말기에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학예부장과 베이징 특파원을 지냈다. 해방 후에는 동국대 국문학과 교수 및 중앙대 문과대학장으로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미국발 신비평(뉴크리티시즘)의 한국 소개에 앞장섰다. 그처럼 다양한 활동의 바탕에는 고향인 평북 신의주에서부터 집안의 종교였던 천도교라는 중심이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 김 교수의 분석이다.

얼핏 갈팡질팡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백철의 행보에 김 교수는 ‘웰컴주의’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새로운 사상이 들어오면 대번에 ‘웰컴!’ 하고 외치며 물불 가리지 않고 수용하여 흥분하다가도 또 다른 사조가 들어오면 전의 것을 헌신짝모양 던져버리고 다시 ‘웰컴!’을 외치기”(546쪽)라는 뜻이다. “이 ‘웰컴주의’에 민감한 비평가로 백철 오른편에 설 자는 일찍이 없었다.”(546쪽) 그러나 그게 또 어찌 백철만의 문제이랴. “근대를 문제 삼는 한, 그 누구도 많건 적건 이 웰컴주의에서 자유롭기 어렵다.”(547쪽)

선배 비평가 백철에 관한 이런 양가적 평가에서는 근대문학 연구자로서 김 교수의 어쩔 수 없는 자의식이 만져진다. 사실 700쪽에 가까운 두툼한 책 <백철 연구>를 읽다 보면 수시로 연구 대상인 백철의 모습에 연구의 주체인 김 교수의 모습이 포개지곤 한다. “이 책은 사실 백철론이 아니라 김윤식론이다. <백철 연구>를 완성하는 데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데에는 그런 까닭도 작용했다”고 11일 오후에 만난 김 교수는 말했다. 책에는 일제 말기 백철의 활동 무대였던 베이징의 북경반점 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 교수 자신의 사진도 들어 있다.


<백철 연구>의 부제는 ‘한없이 지루한 글쓰기, 참을 수 없이 조급한 글쓰기’로 되어 있다. 전자가 문학사가로서의 저술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현장비평가로서 쓴 글들을 이르는 말이다. 이 두 가지 글쓰기에서 지은이 김윤식 교수 역시 백철에 못지않았다. 작고한 김현과 함께 쓴 <한국문학사>와 카프 연구서인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그리고 <임화 연구> <이광수와 그의 시대> <염상섭 연구>와 같은 숱한 작가론저들은 김 교수의 돌올한 업적을 이룬다. 그와 동시에 벌써 수십 년째 계속해 오고 있는 소설 월평 역시 그만의 독보적인 영역으로 꼽힌다. “그만큼 소설을 매달 열심히 읽은 자도 없으며 이를 괴발이든 개발이든 월평으로 써낸 비평가도 백철을 빼면 신문학 생긴 이래 아무도 없었다”(669쪽)고 김 교수가 쓸 때 그것은 백철의 이름을 빌린 김 교수의 자기 평가라 할 법하다.

국문학자와 비평가가 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을 했을 것 같냐는 질문에 김 교수는 그저 머리를 저었다. 다른 길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만 “대학 시절에 쓴 소설 습작 원고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말로 창작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내비쳤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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