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정과 노래 흐르던 목계나루 삶의 흔적까지 물에 잠길라”
대운하건설 반대 순례단 만난 신경림 시인
70년대 암울함 부축했던 ‘목계장터’
강물따라 뗏목 내려가던 ‘장관’ 못잊어
“운하 생겨 강 바뀌면 울림 없어질 것”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신경림 <목계장터> 부분) 신경림 시인의 목소리가 목계나루에 낭랑히 울려퍼졌다. 8일 오후 4시께 충북 충주시 남한강 목계대교 옆. 경부대운하 건설에 반대하는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 순례단과 <목계장터>의 시인 신경림(73)씨가 만났다. 지난 2월12일 한강 하구 김포 애기봉 조각나루를 출발해 한강을 거슬러 오른 뒤 낙동강과 영산강, 금강을 차례로 답파한 순례단이 다시 남한강을 따라 하류로 향하던 중 <목계장터>의 무대인 목계나루를 지나는 길이었다. 100여명에 이르는 순례단 앞에서 신경림 시인은 목계나루에 얽힌 추억을 풀어놓았다. “제 어릴 때는 열 척에서 스무 척에 이르는 뗏목이 강을 따라 내려가는 광경이 정말 장관이었어요. 뗏목꾼들이 주거니 받거니 부르는 노래도 일품이었고요. 서울에서 배로 사흘 거리인 목계나루는 남한강의 물산이 집결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장이 서면 길게는 닷새까지 흥정이 계속되고, 그동안 씨름이며 줄다리기 같은 놀이가 진행되고 술 파는 집에서는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해요. 운하가 건설되고 댐이 생기면 그런 삶의 흔적이 다 물에 잠기지 않겠습니까?”
신경림 시인과 순례단의 만남은 <한겨레>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순례단이 이날 목계나루를 지난다는 소식을 듣고 <한겨레>는 신경림 시인한테 현장에 동행해 줄 것을 요청했고 시인은 이에 흔쾌히 응했다.
8일 아침 탄금대 시민공원을 출발한 순례단은 오후 4시께 목계교 건너 <목계장터> 시비 현장에 도착했다. 미리 와 있던 신경림 시인은 도법·수경 스님과 문정현 신부, 이필완 목사 등 순례단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환영하고 격려했다. 탄금대에서 목계나루까지 하루치의 걷기를 마친 일행은 시비 둘레에 둥글게 모여 섰다. 이들은 옆사람의 어깨를 주무르고 등을 두드림으로써 하루 동안 쌓인 피로를 풀어 준 뒤, 1분 동안 명상을 하고 ‘생명의 강을 모시는 큰절’을 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감했다. 마무리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상공으로는 여러 대의 공군기가 굉음을 울리며 지나갔다.
절을 마치고 시비 둘레에 자연스럽게 둘러앉은 순례단 앞에 선 신경림 시인은 “여러분을 제 고향에서 만나니 반갑고 고맙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인은 <목계장터>를 구상하던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75년 평론가 염무웅과 함께 원주 감옥에 있던 김지하 시인을 면회하고 돌아오던 길에 목계나루를 찾았지요. 당시의 암담한 정치 상황을 이곳의 풍광에 투사했던 것 같아요. 세상에서 버림받고, 희망은 없이 절망뿐인가 하면, 허무한 가운데서도 떠돌이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향한 그리움 같은 걸 복합적으로 시에 담았습니다.” 시인의 설명에 이어 순례단과 함께 걷고 있는 대학생 신지혜(이화여대 언론정보학부 2학년)씨가 <목계장터>를 낭독했다. 낭송이 이어지는 동안 시인은 시를 쓰던 무렵을 회상하는 듯 그윽한 눈빛이었다. <목계장터> 낭독에 이어 시인 자신이 <목계장터>와 비슷한 무렵에 쓴 시 <4월 19일 시골에 와서>를 낭송했다.
순례단 일행 앞에서 시 낭송과 짧은 ‘강연’을 끝낸 시인은 순례단의 주축인 종교인과 시인들을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운하 문제로 집중되었다.
“순례를 다녀 보니 지역 여론들이 어떻던가요?”(신경림)
“지역에서 오래 농사를 짓고 산 진짜 농민들은 순례단에 우호적입니다.”(수경 스님)
“땅값이 올라서 현지 사람들이 운하에 찬성한다고들 하지만, 미리 정보가 새서 주변 땅은 서울 사람들이 다 샀습니다. 그 바람에 땅값만 올라서 지역민들은 거의 소작농화했어요.”(안승길 신부)
이어서 시인은 자리를 옮겨 순례단의 일원인 박남준·이원규·김하돈 등 후배 시인들과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격려했다. 이 자리에는 <목계장터> 시비의 글씨를 쓴 판화가 이철수씨 부부도 동참했다.
“남한강만 해도 물이 아주 좋은 편입니다. 영산강과 낙동강은 폐·오수 냄새가 심해서 걷기가 더 힘들었어요.”(이원규)
“지금은 강이 굽이쳐 흐르고 나루의 흔적이라도 있으니까 <목계장터>가 울림을 주지, 만약 운하가 생겨서 지금의 모습이 없어지면 독자들이 시를 읽어도 무슨 소린지 모르지 않겠어요? 운하만은 막아야 합니다.”(박남준)
충주/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강물따라 뗏목 내려가던 ‘장관’ 못잊어
“운하 생겨 강 바뀌면 울림 없어질 것”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신경림 <목계장터> 부분) 신경림 시인의 목소리가 목계나루에 낭랑히 울려퍼졌다. 8일 오후 4시께 충북 충주시 남한강 목계대교 옆. 경부대운하 건설에 반대하는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 순례단과 <목계장터>의 시인 신경림(73)씨가 만났다. 지난 2월12일 한강 하구 김포 애기봉 조각나루를 출발해 한강을 거슬러 오른 뒤 낙동강과 영산강, 금강을 차례로 답파한 순례단이 다시 남한강을 따라 하류로 향하던 중 <목계장터>의 무대인 목계나루를 지나는 길이었다. 100여명에 이르는 순례단 앞에서 신경림 시인은 목계나루에 얽힌 추억을 풀어놓았다. “제 어릴 때는 열 척에서 스무 척에 이르는 뗏목이 강을 따라 내려가는 광경이 정말 장관이었어요. 뗏목꾼들이 주거니 받거니 부르는 노래도 일품이었고요. 서울에서 배로 사흘 거리인 목계나루는 남한강의 물산이 집결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장이 서면 길게는 닷새까지 흥정이 계속되고, 그동안 씨름이며 줄다리기 같은 놀이가 진행되고 술 파는 집에서는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해요. 운하가 건설되고 댐이 생기면 그런 삶의 흔적이 다 물에 잠기지 않겠습니까?”

대운하건설 반대 순례단 만난 신경림 시인
“1975년 평론가 염무웅과 함께 원주 감옥에 있던 김지하 시인을 면회하고 돌아오던 길에 목계나루를 찾았지요. 당시의 암담한 정치 상황을 이곳의 풍광에 투사했던 것 같아요. 세상에서 버림받고, 희망은 없이 절망뿐인가 하면, 허무한 가운데서도 떠돌이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향한 그리움 같은 걸 복합적으로 시에 담았습니다.” 시인의 설명에 이어 순례단과 함께 걷고 있는 대학생 신지혜(이화여대 언론정보학부 2학년)씨가 <목계장터>를 낭독했다. 낭송이 이어지는 동안 시인은 시를 쓰던 무렵을 회상하는 듯 그윽한 눈빛이었다. <목계장터> 낭독에 이어 시인 자신이 <목계장터>와 비슷한 무렵에 쓴 시 <4월 19일 시골에 와서>를 낭송했다.

“흥정과 노래 흐르던 목계나루 삶의 흔적까지 물에 잠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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