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역할론의 계보
자본주의 ‘극복’ 아닌 ‘인간화’ 지향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김대중 정부 출범 초기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지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입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추구하고, 자본주의의 ‘극복’이 아닌 ‘인간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론’의 닮은꼴이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시장에서의 자유경쟁을 보장하지만, 사회적 형평과 시장질서 확립을 위해 정부 개입을 허용하는 경제 시스템이다.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경제 민주화’를 핵심 가치로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1948년 제헌헌법의 ‘사회화된 자본주의’ 이념이나 1960~70년대 국내 민주화세력의 ‘민족경제론’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민족경제론은 외자도입과 수출 지향의 경제 시스템이 아닌, 내포적 산업화에 기반한 민주적 국민경제를 대안으로 제시함으로써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중 경제론’에도 사상적·논리적 근거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1990년대 중반 자본·금융 시장 자유화에 뒤따른 외환위기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시장과 국가의 실패’를 넘어서려는 입론들이 다양한 형태로 표출됐다. 그 출발점이었던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표방하는 이념의 ‘상대적 진보성’에도 불구하고 개방과 탈규제, 노동 유연화에 치우침으로써 고용 불안과 양극화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이어 등장한 것이 ‘사회적 경제론’과 ‘사회투자국가론’이다. 2000년대 초 도입된 사회적 경제론은 외환위기 이후 실업과 양극화 문제가 대두하자 실업자 구호와 일자리 창출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논의됐다. 핵심은 국가와 시장으로부터 자율적인 ‘제3섹터’를 창출해 대량실업이나 새로운 서비스 수요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생활협동조합과 공정무역, 지역화폐, 최근 주목받는 사회적 기업 등 다양한 대안들이 소개됐다.
영국식 ‘제3의 길’ 노선에 뿌리를 둔 사회투자국가론은 주거·교육·의료 등의 인프라가 갖춰져야 지식기반경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인식 아래 국가의 역할을 전통적인 물적 자본이 아닌, 인적·사회적 자본을 확충하는 데 집중시킬 것을 제안했다. 이 밖에 지속 가능한 사회경제 시스템을 창출하기 위해 국가가 의료·복지·환경 분야에 공공고용을 창출하고 재생에너지-환경산업을 육성하는 한편, 노동과정과 금융의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경제공공성 강화론’도 주목받는 대안 가운데 하나다.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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