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숨결〉
로맹 가리 1935~67년 발표 중·단편
식민지 알레고리 등 극적 반전 신선
식민지 알레고리 등 극적 반전 신선
〈마지막 숨결〉
로맹 가리 지음·윤미연 옮김/문학동네·1만1000원 첫 번역작으로 1956년 공쿠르상 수상작인 <하늘의 뿌리>(1968)가 있지만, 로맹 가리란 이름이 국내에 본격 회자된 것은 1980년 권총 자살한 그의 유언장을 통해, <자기 앞의 생>으로 1975년 공쿠르상을 받은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의 필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다. 이후 단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1994)가 재출간되고, <중요한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1999) <유럽의 교육>(2003) 등 대표작이 속속 (재)번역되면서, 로맹 가리는 눈부신 시각 이미지를 구축하는 문체의 섬세함과 극적 반전의 이야기 구조에 매료된 열성 독자들을 꾸준히 규합해 왔다. 이번에 출간된 로맹 가리의 소설집 <마지막 숨결>에는 1935년부터 1967년 사이 잡지 <그랭구아르>와 <자유프랑스 위원회보> 등에 발표된 5개의 단편과 중편 분량의 미완성 원고 2편이 담겨 있다. 첫 번째 수록작인 <폭풍우>(1935년)는 청년 로맹 가리가 포착한 동시대 프랑스의 식민지 사회를 문명과 자연, 남과 여의 대립 같은 중층의 알레고리들로 형상화한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야자농장을 경영하며 살아가는 의사 파르톨과 엘렌 부부에게 낯선 백인 남자 페슈가 찾아온다. 이 “야생동물처럼 거친 남자”의 출현은 “열대의 태양이 사랑마저 앗아가 버린” 엘렌의 가슴에 연민과 설렘이 뒤섞인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페슈가 섬을 찾은 이유는 작품의 결말부에 이르러서야 밝혀지는데, 그 시점은 엘렌이 폭풍을 무릅쓰고 섬을 떠나려는 페슈를 만류하다 충동적으로 성관계를 맺고, 엘렌의 눈앞에서 페슈가 폭풍에 휘말려 죽음을 맞고 난 뒤다. 떠나는 페슈를 잡지 않았다고 책망하는 엘렌에게 파르톨은 말한다. “그는 나를 만나러 왔었어, 내가 의사라는 말을 듣고 이 섬으로 날 찾아온 거라고. 그는 나병에 걸렸어. 퓌지 섬 원주민에게서 옮은 거지.”
파르톨이 총과 돈, 의학 지식을 무기로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섬에서 페슈는 백인 남성이면서도 문명과 자연의 요소가 기괴하게 착종된 괴물적 존재로 그려지는데, 그는 난폭하고 동물적인데다 나병이라는 ‘야만의 질병’까지 갖고 있다. 폭풍전야의 적막을 깨뜨리며 등장한 페슈는, 권태로운 섬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위생학적 격리와 제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이 황혼으로 치닫는 식민지 체제의 불안과 위기의식을 다룬 정치적 알레고리로 읽히는 것도 이 대목이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폭풍우는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위력을 지칭하는 동시에, 페슈로 의인화된 인위적 위험을 가리키는 이중의 기표로 기능하는 셈인데, 그것의 실제적 지시대상은 분명치 않다. 서구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성장하는 식민지 민족주의, 혹은 반파쇼 인민전선의 우산 아래 세력을 확장하는 사회주의. 가능성은 어디든 열려 있다.
표제작인 <마지막 숨결>은 1970년을 전후해 영어로 쓴 미발표 원고로, 역시 로맹 가리 소설의 특징인 의도된 반전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작가의 ‘분신’격인 오십줄의 프랑스 퇴역 기관원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과거 동료를 만나 자신의 목숨을 끊어줄 유능한 살인청부업자의 알선을 부탁한 뒤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우연히 들른 스낵바에서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주근깨투성이의 20대 웨이트리스를 만나게 되고, 그 여자와의 대화를 통해 주인공은 전쟁 전 사랑했던 옛 연인과의 추억에 빠져든다. 일급 청부업자를 소개받아 범행시간과 장소를 통보하고 신변을 정리한 뒤 차분히 죽음을 맞이하려는 남자. 그런데 얼굴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돌아서는 주인공 앞에 모습을 드러낸 청부업자는 조금 전의 그 주근깨투성이 웨이트리스다. 사건의 정보를 조금씩 누설하며 긴장을 고조시키다 결말부의 반전으로 ‘결정적 한방’을 날리는 계산된 플롯 만들기는, 이야기꾼의 능란함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을 가늠하게 만든다.
또다른 미발표 원고 <그리스 사람>은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갖지 못한 미완의 작품이지만, 물이 오른 언어 유희와 회화적 묘사의 치밀함이 완숙기에 다다른 로맹 가리 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서문을 쓴 프랑스 작가 에리크 뇌오프는 말한다. “로맹 가리는 자신의 언어인 ‘가리어’로 글을 쓴다. 거칠면서도 부드럽고, 목소리가 잠긴 것 같으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그와 동시에 너무도 독특해서 도저히 뭐라고 분류할 수 없는 프랑스어.”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로맹 가리 지음·윤미연 옮김/문학동네·1만1000원 첫 번역작으로 1956년 공쿠르상 수상작인 <하늘의 뿌리>(1968)가 있지만, 로맹 가리란 이름이 국내에 본격 회자된 것은 1980년 권총 자살한 그의 유언장을 통해, <자기 앞의 생>으로 1975년 공쿠르상을 받은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의 필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다. 이후 단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1994)가 재출간되고, <중요한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1999) <유럽의 교육>(2003) 등 대표작이 속속 (재)번역되면서, 로맹 가리는 눈부신 시각 이미지를 구축하는 문체의 섬세함과 극적 반전의 이야기 구조에 매료된 열성 독자들을 꾸준히 규합해 왔다. 이번에 출간된 로맹 가리의 소설집 <마지막 숨결>에는 1935년부터 1967년 사이 잡지 <그랭구아르>와 <자유프랑스 위원회보> 등에 발표된 5개의 단편과 중편 분량의 미완성 원고 2편이 담겨 있다. 첫 번째 수록작인 <폭풍우>(1935년)는 청년 로맹 가리가 포착한 동시대 프랑스의 식민지 사회를 문명과 자연, 남과 여의 대립 같은 중층의 알레고리들로 형상화한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야자농장을 경영하며 살아가는 의사 파르톨과 엘렌 부부에게 낯선 백인 남자 페슈가 찾아온다. 이 “야생동물처럼 거친 남자”의 출현은 “열대의 태양이 사랑마저 앗아가 버린” 엘렌의 가슴에 연민과 설렘이 뒤섞인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페슈가 섬을 찾은 이유는 작품의 결말부에 이르러서야 밝혀지는데, 그 시점은 엘렌이 폭풍을 무릅쓰고 섬을 떠나려는 페슈를 만류하다 충동적으로 성관계를 맺고, 엘렌의 눈앞에서 페슈가 폭풍에 휘말려 죽음을 맞고 난 뒤다. 떠나는 페슈를 잡지 않았다고 책망하는 엘렌에게 파르톨은 말한다. “그는 나를 만나러 왔었어, 내가 의사라는 말을 듣고 이 섬으로 날 찾아온 거라고. 그는 나병에 걸렸어. 퓌지 섬 원주민에게서 옮은 거지.”
작가 로맹 가리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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