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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모같은 선생님이 일으킨 조용한 기적

등록 2009-02-27 18:15수정 2009-02-27 18:22

〈산동네 공부방, 그 사소하고 조용한 기적〉
〈산동네 공부방, 그 사소하고 조용한 기적〉
〈산동네 공부방, 그 사소하고 조용한 기적〉
최수연 지음/책으로여는세상·1만원

“나는 무엇보다 남자 아이들이 나이가 들어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혼자 남는 그림을 그린 것이 너무 가슴아팠다. …나는 할머니 없이 혼자 노년을 맞이하는 그림을 그린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넌 왜 할머니가 일찍 죽고 할아버지 혼자만 남은 그림을 그린 거야?’ ‘여자들은 말 안 들으면 패줘야 되거든요. 그래서 나도 결혼하면 때려줄 거예요. 많이 맞으면 골병들어 빨리 죽잖아요? 그래서 나 혼자 남은 거예요. 그리고 혼자 남아 후회하는 거예요.’ ”

부산 산동네 공부방 20년 이야기
아이·부모·선생 함께 커가는 모습
“많이 안아줘야 하는 아이들” 신념

가난한 산동네 아이들의 미래는 때로는 처절한 현실에 갇히곤 한다. 추운 겨울 홀로 남겨진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연탄불을 가는 곳. 싸움 소리가 끊기는 날이 없고, 술 취한 아버지들의 살림살이 때려 부수는 소리도 낯설지 않은 가난한 동네. 한낮에는 젊은 사람들은 모두 공장으로 공사장으로 또는 남의 집 파출부로 일하러 가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이들만 남겨지는 이곳은, 부산 감천동 산동네이다. “손수레라도 지나가는 날이면 무슨 행사를 치르듯 소란해지는” 좁디좁은 산비탈 골목에, 어느 날 공부방이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조금씩 변한다.


〈산동네 공부방, 그 사소하고 조용한 기적〉
〈산동네 공부방, 그 사소하고 조용한 기적〉
“함부로 방치된 아이들이 가난을 대물림하는 악순환”을 끊고자 1988년 무료 공부방을 연 지은이 최수연씨는 감천동에서 보낸 20년 이야기를 담아 <산동네 공부방, 그 사소하고 조용한 기적>을 펴냈다. “엄마의 젖가슴 더듬듯 무심코” 가슴을 만지던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 때문에 깜짝 놀라 소리쳐서 애를 울려놓고 미안해하던 처녀 선생님이, 도둑질한 아이 때문에 경찰서에 불려가고 때로는 술취한 아이 새엄마에게 멱살을 잡히기도 하며 아이들과 그리고 부모들과 함께 ‘커가는’ 모습을 담았다.

공부방은 홀로 남겨진 아이들에겐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외환위기가 닥쳤을 땐, 공적인 사회안전망을 기대할 수 없는 산동네 사람들을 지켜주던 마지막 보루이기도 했다.

“(98년 외환위기 때는) 날이 새면 ‘이모, 우리 아이 좀 받아주면 안 되겠어요?’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아침이면 공부방으로 찾아와 눈물을 글썽이며 ‘아이구 선생님, 우리 아 좀 받아줘요’ 했다. 공부방 주변에 있는 초등학교 선생님들도 심심찮게 전화를 했다. ‘우리반 아이가 갈 데가 없어요. 아이가 너무 딱해요. 밥도 못 먹고, 컴컴한 방에서 혼자 하루종일 있어요.’ …돈 벌러 나간다고 부모가 모두 가출한 경우였는데, 호적상 보호자가 있기 때문에 마땅히 갈 만한 시설이 없었던 것이다.”

다른 아이를 꼬집고 때리는 초등학생들, 폭력서클을 결성해 공부방 집기를 부수던 중학생들…. 그럴수록 “더 많이 안아주어야 하는 아이들”이라는 흔들림 없는 믿음 덕분에 아이들은 햇볕 받은 새싹처럼 자라난다. 변화는 마을 전체로 퍼져나간다. 공부방은 단지 아이들을 위한 곳만이 아니다. 아이들 상담하러 모였던 엄마들이 글눈을 틔우는 장소가 되고, 공사장 일용직으로 나간 아버지들이 영어를 배우고, 치료받을 돈이 없는 노인들이 한 번씩 자원봉사하는 한의사에게 침을 맞으러 오기도 하며 따뜻한 활기를 찾는 마을의 풍경은 잔잔하지만 가슴을 울린다.

꼼꼼하게 기록한 일화 속에서 찾아보는 1980~90년대의 풍경을 되짚는 맛도 새록새록하다. “개 팔아라, 개! 고양이나 개 팔아라. 개 팔아!” 늘 반말로 외쳤던 무뚝뚝한 개장수 할아버지와 동네 할머니가 벌이는 실랑이며, 공부방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외국인 선생님이 비좁은 ‘푸세식’ 화장실에 몸이 끼어 밀고 당겨줘야 했던 이야기, 산동네 골목에 구비구비 호스를 돌려감던 ‘똥차’가 폭발해 공부방 1주년 행사에 ‘똥폭탄’ 세례가 터진 이야기, 대학생들이 기금을 모으겠다며 벌인 축제에서 벌어진 난장판 등 우스꽝스런 추억담들이 감동 속에서 소소한 읽는 재미를 더한다.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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