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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소설 쓰려거든 광기속에 스스로를 감금하라

등록 2009-03-20 19:14

소설가 한승원(70)씨
소설가 한승원(70)씨
한승원씨 ‘…소설쓰는 법’ 출간
50년 갈고닦은 창작 비밀 누설
“초심자는 일사천리로 쓴 뒤
많이 수정하는 방법이 좋아”
〈한승원의 소설쓰는 법〉
한승원 지음/랜덤하우스·1만3000원

“1967년 9월 어느 날, 나는 스님처럼 머리를 하얗게 깎아버리고 나를 나의 내면에 가두었다. 소설을 위하여 나를 내 속에 감금한 첫 번째 사건이었을 터이다.”

소설가 한승원(70)씨가 반세기 가까이 탁마해온 창작 비급을 누설했다. 1968년 단편 ‘목선’으로 등단한 이래 <포구의 달> <해변의 길손> <다산> <초의> 등으로 이어져온 작품 활동의 공력을 300쪽 남짓한 작법 매뉴얼 <한승원의 소설 쓰는 법>에 담아낸 것이다.

지은이가 등단작 ‘목선’의 집필에 들어간 것은 산골 초등학교의 초임교사로 있던 스물여덟 살 무렵이다. 그는 당시를 “동료 교사들이 숙직실로 끌어내는 대로 끌려가서 닭과 술 내기 바둑 두고 장기 두고 화투치고, 술에 푹 젖어 살고, 젊은 아내와 깨 쏟아지는 사랑 놀음을 하고…. 나를 잃어버린 채 표류하”던 시절로 회고했다. 돌연한 자각에 숙직실 출입을 끊고 소설 쓰기에만 전념한 그는 고교 졸업 뒤 3년간 고향 섬 마을에서 김 양식을 한 경험을 소재 삼아 어촌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농촌 소설이 대세를 이루던 시절에 바닷가를 배경으로 작품을 구상했으니 속된 말로 ‘반은 먹고들어가는’ 것과 진배없었다. 양산댁이란 여자와 그가 소유한 나무배를 둘러싸고 석주라는 남자 주인공과 태수라는 남자가 갈등을 빚는 구도로 얼개를 짰다.

“김동리 선생에게서 단편소설의 주요 인물은 절대로 많지 않아야 한다고 배웠다. 단순한 주제, 단순한 인물, 단순한 구성이어야 한다. 나는 그 가르침대로 했다.”

원고지 앞에 좌정한 뒤엔 서두, 특히 첫 문장이 중요했다. 그는 첫머리를 “봄부터 가을까지 채취선을 빌려다 쓰기로 하고, 지난해 겨울 동안 양산댁네 김 채취 머슴을 산 석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전개될 사건의 골격을 넌지시 보여주면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느닷없는 서술로 읽는 이의 호기심을 단박에 포획하려는 심산이었다.

결말 역시 서두 못잖게 공을 들였다. 좋은 마무리는 길고 아름다운 여운을 남겨야 하는 까닭이다. 카뮈의 실존주의에 심취해있던 20대의 한승원은 ‘허무를 극복한 생명력’을 암시하는 것으로 작품을 매듭짓고 싶었다. 신열을 앓으며 뽑아낸 문장은 이러했다.



〈한승원의 소설쓰는 법〉
〈한승원의 소설쓰는 법〉
“먼바다에는 한가로운 잔물결의 이랑들이 햇빛을 받아 금빛 고기비늘처럼 반짝거리고, 그 반짝거림 속에 오징어잡이 배들이 장난감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초고를 쓴 뒤엔 고통스런 퇴고의 시간이 이어졌다. 지우고 고치고 또 지웠다. 습작 소설가의 여물지 않은 문장력 탓이 아니었다. 지은이가 보기에 “나는 이 소설을 하룻밤 사이에 썼어”라는 작가들의 말은 모두 사기다. 천재성을 과시하고 싶어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다며 과장하는 게 글쓰는 사람의 생리란 얘기다.

“소설을 써온 지 50년 가까이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 어떤 소설이든지 한 번에 써내질 못한다. 고향 바닷가에 토굴을 마련하고 글쓰기에 몰두한 이래로는 최소한 열 번 이상을 수정 가필하고 추고한다.”

하지만 자신이 ‘둔한 노력형 작가’로 분류되는 것이 지은이는 달갑잖다. 세상에는 다만 두 유형의 작가가 있을 뿐이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완성시켜나가는 작가가 한 유형이요, 다른 하나는 일사천리로 쓰고 수없이 많은 추고 과정을 거쳐 작품을 마무리짓는 유형이다. 그는 “어느 작가의 방법이 좋다고 말할 수 없다”면서도 초심자에게는 두 번째 방법을 권한다. 문장이 막혀 작품을 중단하게 될 위험이 적은데다, 컴퓨터로 작업하는 요즘 추세에도 맞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목선’을 동봉한 봉투를 우체국에서 발송하면서 당선을 확신했다고 한다. “한 장면 한 장면 그림 그리듯이 형상화한 섬세하고 밀도 있는 문장”도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그가 요즘 탄복하는 문장은 김훈의 것이다. 이를테면 <남한산성>에 등장하는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빛으로 얼어붙었고, 언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그해 눈은 메말라서 버스럭거렸다. 겨우내 가루눈이 내렸고, 눈이 걷힌 날 하늘은 찢어질 듯 팽팽했다” 같은 묘사문. 이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잘 쓴 보석 같은 문장의 전범”이라고 그는 절찬한다.

지은이가 공개하는 소설 잘 쓰는 비결에는 이것 말고도 많다. 반전을 적절히 활용하라, 신화와 전설에 주목하라, 비유의 묘미를 터득하라 등이다. 다만 이 모든 작법의 잔기술을 능가하는 큰 덕목이 있으니, ‘몰입’이다.

“젊은 시절부터 내 작가실 바람벽에 ‘狂氣’(광기)라는 두 글자를 흰 종이에 써서 붙여놓고 글을 썼다. 소설가가 되어 한국 소설문학의 판도를 바꾸겠다는 꿈을 꾸는 당신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다. 소설 쓰는 일에 미쳐버려라.”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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