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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남녀, 그 섬세하고 절절한 ‘관계의 보고서’

등록 2010-03-19 19:12수정 2010-03-19 19:12

〈대설주의보〉
〈대설주의보〉
단편7개 묶은 3년만의 신작
불륜의 외피를 쓴 남녀사이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 탐구




〈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문학동네·1만2000원

대설주의보가 내린 봄날, <대설주의보>의 작가를 만났다. 1982년도 오늘의작가상 수상작인 최승호의 시집 얘기가 아니다. <제비를 기르다>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윤대녕의 신작 소설집 제목이 또한 <대설주의보> 아니겠는가. 표제작을 비롯해 단편 일곱이 묶였다.

표제작의 주인공 윤수는 대설주의보를 뚫고 백담사를 찾아간다. 그곳에는 누가 있었던가. 오래전에 1년 정도 사귀었다가 헤어진 뒤, 몇 달 혹은 몇 년에 한 번씩 연락을 취하고 이따금씩 만나기도 하는 해란이 있었다. 윤수 자신은 둘의 관계를 두고 “늘 그리워하지는 않아도 언젠가 서로를 다시 찾게 되고 그때마다 헤어지는 것조차 무의미한 관계”라 표현한다. 어처구니없는 모함과 오해로 갈라서야 했던 두 사람은 그 뒤 각자의 생의 행로를 좇아 멀어지는 듯했다. 그렇지만 애초에 서로를 알아보게 만들었던 생의 결락이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했고,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를 지금껏 이어 오게 만들었다.

남편과의 사이에 아이도 없는데다 아예 혼인신고조차 하지 않은 해란이 최근에는 자살 기도까지 한 적이 있다는 소식이 윤수의 백담사행을 이끈다. 그러나 대설주의보가 윤수의 발목을 잡는다. 원통 읍내에서 전전긍긍하던 윤수는 해란과의 통화조차 여의치 않자 대리운전 기사를 불러 자정 가까운 눈길을 뚫어 보기로 한다. 원통에서 백담사 입구까지 20분 거리를 1시간에 걸쳐 달려간 뒤 남은 6킬로미터 남짓 눈길을 힘겹게 헤쳐 가던 그의 앞에 아르브이 차에 탄 해란이 출현하는 장면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윤대녕씨
윤대녕씨

<보리>와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 <오대산 하늘 구경>에는 유부남과 미혼녀 또는 이혼녀 커플이 등장한다. <대설주의보>와는 남과 여가 바뀐 형국이다. 멀쩡한 유부남에게 “1년에 그저 몇 번만 만나주면 됩니다”라는 제안을 하고 결국 그 제안대로 살아가는 수경(<보리>), “정말 힘들다 싶으면 가끔 신호를 보낼 테니 그때마다 가볍게 안아만 주세요”라는 정희(<꿈은 사라지고의 역사>), “나란 존재는 단지 환절기에 잠시 필요할 뿐인 거예요”라 불평하면서도 남자를 떠나지 못하는 연미(<오대산 하늘 구경>) 등은 어쩌면 영혼의 쌍둥이들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파트너인 남자들이 바람둥이인 것은 아니다. 남자들은 대체로 평탄하고 유복한 환경에 놓여 있지만, 그들 역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결핍과 공허감에 시달리고 있다.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의 정수의 말을 들어 보라. “왜 우리는 늘 비석 없는 무덤들처럼 공허한 것일까. 여름 한낮 햇빛에 뜨겁게 타고 있는 빈 마당을 볼 때처럼. 다만 혼자일 뿐인데, 실은 나도 그게 견디기 힘들어.”

<은어낚시통신>과 <추억의 아주 먼 곳>으로 대표되는 초기 윤대녕의 소설에서라면 정수의 이런 고백은 시원(始原)을 찾아가는 존재의 모험으로 이어졌으리라. 그러나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가 일종의 낭만적 초월이었다면, 어느덧 지천명을 바라보게 된 윤대녕의 최근 소설들은 어디까지나 일상과 현실, 그리고 인간의 편을 떠나지 않는다. 카페와 오피스텔에서 마시던 외제 맥주가 순댓국밥집이나 포장마차에서의 소주로 바뀐 변화가 그것을 상징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변화 속에서 윤대녕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를 천착하고 있다.


소설집 <대설주의보>는 가히 관계의 실험실 또는 관계의 보고서라 할 정도로 이런저런 관계의 탐구를 시연해 보인다. 그런 관계의 외양이 이른바 ‘불륜’의 외피를 쓰고 있기 십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생파 또는 신파라는 말로 그것을 무지르기보다는 그 섬세하고 절절한 사연과 심사에 주목할 일이다. 관계란 나와 너와 그 사이에 성립하는 것이지만, 결국은 나의 문제이고 다른 누구가 아닌 나의 정직한 반영이기 때문이다.

변화 속에 변하지 않는 것도 물론 있다. “식탁에 엎질러진 물처럼 봄이 오고 있어” “숟가락을 이빨로 깨무는 심정으로” “변소에 앉아 있다 난데없이 지붕에 폭탄을 맞은 심정으로”와 같은 윤대녕 특유의 비유들이 그러하다.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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