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렌즈〉
〈제국의 렌즈〉
이경민 지음/산책자·1만8000원 한일 강제병합 3년 전인 1907년,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는 한국 방문 기념으로 경복궁 경회루 앞에서 영친왕, 이토 히로부미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보면, 화면 좌우로 인물을 고루 배치하는 상례에 어긋나게 요시히토를 화면 중심에 놓고 영친왕을 비롯한 나머지 인물들을 오른쪽으로 몰아넣었다. 같은 날 남산 통감관저 앞에서 순종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도, 요시히토는 순종보다 더 크고 화려한 의자에 앉아 훨씬 위엄 있는 모습을 연출한다. 한결같이 요시히토를 중심으로 한 서열관계를 부각하고 ‘식민지 조선’의 이미지를 강조한 사진들이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조선 황실의 촉탁 사진사로 일하고 있던 일본인 무라카미 덴신이었다. 우리는 남아 있는 사진들을 통해 우리의 과거를 확인하고 인식한다. 어색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고종과 순종의 모습, 서울 시내를 뒤덮은 초가집과 진흙투성이 거리, 지저분한 차림새의 무표정한 민초의 모습 등이 담긴 색바랜 흑백사진들은 우리나라의 근대가 어땠는지 말해주는 정보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표현하는 이미지 못지않게 중요한 정보는 누가 어떤 배경으로 그런 사진을 찍었느냐다. “카메라 뒤에는 항상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재현 주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진기록학이라는 독특한 학문 영역을 구축한 이경민(사진아카이브연구소 연구원)씨의 <제국의 렌즈>는 식민지 시절 일본인과 서양인들이 찍은 사진들을 세세히 분석해, 사진 속에 숨어 있는 제국주의적 욕망을 읽어낸 책이다. 우리나라는 1876년 개항 앞뒤로 줄곧 피사체 입장이었다. 1880년대 초 지운영, 김용원 등 조선인 사진사들이 등장하긴 했으나, 갑신정변을 계기로 그들이 연 사진관들이 모두 파괴되면서 주체적인 사진의 수용과 정착이 20세기 초반까지 지연됐기 때문이다. 조선 스스로 재현 주체가 되지 못한 공백기를 일제가 채웠다. 일본인 촉탁 사진사가 찍은 황실 사진뿐 아니라 토지·유물·유적 등 식민지배를 위해 펼친 여러 조사사업 과정에서도 일제는 우리나라를 무력한 객체로 대상화한 사진들을 많이 남겼다. 지은이는 이런 사진 자료 속에서 한반도를 근대 학문의 실험장으로 썼던 제국주의적 시선을 발견한다. 또 지은이는 “스스로를 표상·대표할 수 없는 조선인을 대신해 동양인이기도 한 일본인이 그들을 대표하고 ‘타자’인 서양인에게 알린다는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을 만들었다”는 재일 정치학자 강상중 도쿄대 교수의 말을 빌려 이런 상황을 설명한다.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은 자연히 서양의 오리엔탈리즘과 맞닿는다. 지은이는 19세기 말 외교관으로 조선에 왔던 프랑스인 이폴리트 프랑댕과 20세기 초 주일독일대사관 무관 자격으로 조선을 여행한 독일인 헤르만 잔더의 사진첩에서, ‘전근대성’ 하나로 조선을 압축해 대상화했던 시선들을 발견한다. 인물과 지역의 고유명사를 전혀 적지 않은 프랑댕의 사진첩과 더러운 모습이 강조된 어린아이 사진에 대한 관심 등이 단적인 예다.
민족과 인종을 유형화하려는 시도로 ‘인체 측정 사진’을 남긴 일본의 인류학자이자 민족학자인 도리이 류조가 일본 안에서 학문적으로 재평가받고 있는 움직임은, 이러한 제국주의적 시선이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도리이는 한반도뿐 아니라 대만 등 여러 식민지에서 순수 토착민들을 대상으로 범죄인 사진 찍듯이 체격을 비교하고 신체를 측정하는 사진을 찍어댔다. 도리이의 복원 움직임은 “자국의 인류학이 제국의 식민담론에 어떻게 동원되고 봉사했는지 반성하지 않고 그 둘의 관계가 무관한 것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으로 풀이된다. 일본은 교과서 수정 시도를 되풀이하는 등 끊임없이 과거사 청산을 회피하고 있다. 100년 전 사진에 담겨 있던 제국주의적 욕망은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는 것일까.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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