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여행은 ‘길 사랑’ 주어진 틀을 깨는 ‘꿈’

등록 2010-04-16 19:23

여행은 ‘길 사랑’ 주어진 틀을 깨는 ‘꿈’
여행은 ‘길 사랑’ 주어진 틀을 깨는 ‘꿈’
철학자 김재기씨의 인문학적 여행서
“낯선 존재와의 소통…마음을 바꾸라”
〈여행의 숲을 여행하다〉
김재기 지음/향연·1만7500원

대중적인 교통수단이 발달하기 전 ‘여행’은 자신의 존재를 걸 정도로 뚜렷한 목적을 가진 일부 사람들의 몫이었다. <대당서역기>의 현장 법사나 <동방견문록>의 마르코 폴로 등 옛 기행문의 주인공들은 구도나 순례, 장사 등 저마다의 확실한 이유를 품고 미지의 세계에 몸을 던진 사람들이었다. 여행(travel)이란 뜻의 영어는 ‘노동·수고’(travail)라는 뜻의 프랑스어에서 비롯됐을 정도로 옛날의 여행은 고되디고된 일이었던바, 뚜렷한 목적도 없이 그런 고된 일에 몸을 던질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지구 반대편까지 하루 이틀이면 날아갈 정도로 대중교통이 보편화된 지금, 서점에는 여행 관련 책들이 가득하고 인터넷에도 여행 이야기가 넘쳐난다. 국외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해마다 늘고 있다. 옛날 여행자들처럼 존재 전체를 걸어야 할 만큼 절박한 이유가 없는 지금 사람들은 대체 어떤 목적으로 여행을 하고 있는 걸까? 여행의 의미란 도대체 뭘까?

〈여행의 숲을 여행하다〉
〈여행의 숲을 여행하다〉

철학 교수이면서 30여년 동안 국내외로 수많은 여행을 다닌 김재기(52)씨는 “여행의 의미와 가치를 체계적·총체적으로 다뤄보고자” <여행의 숲을 여행하다>를 썼다고 한다. 여행에 관해서는 개인의 체험에 기댄 책이나 실용 여행서 등이 주로 쏟아져나오고 있는데, “개인 체험이라는 나무가 아니라 여행이라는 더 큰 숲 전체를 내려다보게 해주는” 구실을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사랑(philos)과 지혜(sophia)가 합쳐져 이뤄진 ‘철학’(Philosophy)의 어원에 빗대어, 여행에 사랑(philos)과 길(hodos)이 합쳐진 ‘길사랑’(Philodos)이란 이름까지 지어줬다.

지은이는 여행을 “주어진 틀에 순응하는 게 아니라 그 틀을 뛰어넘거나 저항하려는 꿈”과 비슷하다고 풀이한다. 그러나 꿈이란 낱말은 ‘이루다’는 표현뿐 아니라 ‘깨다’라는 표현과도 연관 있다. “‘이룸’과 ‘깨어남’의 변증법적 모순이야말로 꿈의 오묘한 참모습이다.” 여행하기 전에는 여행과 여행지에 대해 나름의 꿈을 꾸지만, 막상 여행지에서는 꿈과는 다른 현실과 맞부딪힌다는 점에서 여행은 꿈과 닮았다.

그래서 지은이는 ‘깨는 꿈’에 해당할, 여행지를 대하는 여행자의 태도에 깊은 의미를 둔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장소나 사람들을 단지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소통하려는 태도를 강조한다. “여행자의 목표는 타자를 이해하고 타자와 소통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여행의 진정한 가치와 즐거움 또한 그런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여행의 의미를 도드라지게 만드는 일곱가지 성격을 ‘여행의 혼’이라고 이름 지었다. 모험, 생존을 위한 전투, 낯선 존재와의 소통, 발견, 깨달음, 자유, 은총 등이다. 여행 때 생긴 갖가지 일들과 더는 카메라를 갖고 다니지 않게 된 늙은 여행객, 기차에서 만난 중국의 소수민족 여학생 등 길 위에서의 만남 등을 들어 각각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여행의 현실적 조건도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 “좋은 여행을 위해선 여행자 자신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지론 아래 정보·언어·태도 등을 여행의 3대 요소로 꼽아 강조하는가 하면, 여유를 내기 힘든 대다수의 요즘 사람들에게 ‘여행은 시간·돈·체력의 함수’라는 명쾌한 법칙을 제시하기도 한다. 가끔 개인 체험담으로 흐르긴 하지만 선진국 위주의 여행 편식에 대한 비판, 윤리적인 여행을 위한 ‘공정여행’ 원칙의 강조 등 풍부한 이야깃거리도 준다.

지금 우리들이 하는 ‘여행을 위한 여행’의 목적에 대해서는 어떤 철학적인 풀이가 가능할까. 지은이는 “여행은 우리의 삶과 참 많이 닮았다”며 직접적인 답을 피한다. 삶 전체를 지배하는 뚜렷한 목적 같은 걸 제시할 수 없듯이 여행의 목적도 막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만 “여행 속에서 우리는 삶을 재발견하며,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우리의 밖에 펼쳐진 이국적인 풍경이 아니라 그 풍경을 바라보며 다시 태어나는 우리들 자신임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여행을 하면서 스스로 느끼는 것 속에 답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언론인 겸 작가인 엘리자베스 드루의 말을 빌려 “마음을 넓히지 않고 여행만 많이 해봐야 수다만 늘어날 뿐”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행이라는 주제를 인문학적인 접근을 통해 풀어내려고 했다는 점에서 프랑스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이 쓴 <여행의 기술>과도 닮았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사진 향연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