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규장각연구원 ‘한국전쟁 60년’ 심포지엄
대한제국·일본제국·인공·미군정·한국…
5개 국가에 속하며 겪은 경험 연구 눈길
대한제국·일본제국·인공·미군정·한국…
5개 국가에 속하며 겪은 경험 연구 눈길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의 해안마을인 ㄱ마을은 해방 직후에는 인민공화국에, 한국전쟁 때에는 미군정 통치지역에, 그 뒤에는 대한민국에 편입됐다. 이른바 ‘수복지역’이라 불리는 곳으로, 38선으로부터 18㎞가량 북쪽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특히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겪었다. ㄱ마을 주민인 한약방 주인 김창순(가명)씨의 삶도 그렇다. 1901년에 태어나 1969년에 숨진 그는 살아생전 식민지·해방·한국전쟁을 경험했다. 그 과정에 대한제국·일본제국·인민공화국·미군정·대한민국 등 무려 다섯 개의 ‘국가’에 속했다.
빈농의 아들인 그는 일제강점기 때 한약방을 차려 벼락부자가 됐고 땅도 8마지기나 샀다. 그러나 소련군 점령 시절 농지개혁 때문에 모든 토지를 몰수당했다. 때문에 그는 북한체제에 반감을 가진 인물이 됐다. 그때 북한 주민사회에서 김씨와 같이 남한 쪽에 우호적인 지주, 소시민, 유산자 등은 ‘흰 패’로 불렸고, 북한체제에 동조하는 무리는 ‘붉은 패’로 불렸다. 두 세력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했고, 한 집안 안에서도 서로 갈려 각각 북과 남으로 흩어지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김씨는 국군의 북진을 기다렸다. 그러나 ㄱ마을에 들어온 국군은 흰 패와 붉은 패를 제대로 가르지 않았다.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빨갱이’라며 죽였고, 자수하러 온 사람들을 이유없이 모두 죽이기도 했다. 김씨 역시 북에서 피란 온 친척과 악수를 나누다 간첩으로 몰려 처형될 뻔했다. 국군은 1·4 후퇴를 하며 이북마을에 모두 불을 질렀다. 김씨의 집과 한약방 역시 잿더미가 됐다. ㄱ마을 사람들은 집터에 판 땅굴 속에서 공습을 피하며 목숨을 이어갔다.
ㄱ마을은 1951년부터 미군정 통치 아래 들어갔고 3년 뒤에는 대한민국에 귀속됐다. 흰 패들은 수복으로 이전의 재산을 돌려받았지만, 전후의 혼란 속에 땅은 헐값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수복지역 사람들은 잠재적 친북인물 취급을 당했다. 김씨의 아들은 간첩사건에 연루돼 그 어디에도 취직할 수가 없었고, 아비 때문에 대학 진학길이 막힌 손자도 물에 빠져 숨졌다. 몰락해버린 김씨도 이 모든 일들에 대해 “내 의지와 관계없는 운명”이라며 결국 죽음을 맞았다.
한국전쟁 60년을 맞아 지난 13~14일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연 심포지엄에서 김영미 국민대 교수(국사학)는 김창순씨를 통해 본 ‘수복지역 주민들의 한국전쟁 경험’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구술로 채록한 수복지역 주민 22명의 생애사 자료를 바탕으로 삼아 수복지역에 살던 평범한 민초의 전쟁 경험을 되살린 것이다. 김 교수는 “전쟁을 기획한 사람들의 의도가 아니라 실제로 발생한 ‘효과’들이 한국전쟁의 전체적인 내용이자 성격”이라며 “전쟁 속 사람들의 경험세계로 연구가 확장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번 심포지엄의 전체적인 취지는 지금까지 초점을 맞췄던 한국전쟁의 기원, 사회구조적 변화, 국제관계 등이 아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연구라는 데에 있다. 냉전 시대의 책임론 연구를 떠나 전쟁의 경험을 객관적으로 따져보자는 것이다. 수복지역 주민들과 함께 재일교포·피학살자들·폭격 희생자들의 전쟁 경험과 포로문제 등의 주제들이 발표됐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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