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잇키-천황과 대결한 카리스마〉
‘2·26 청년장교 쿠데타’에 깊은 영향
국가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 공존한
기타 잇키의 기이하고 불온한 궤적
국가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 공존한
기타 잇키의 기이하고 불온한 궤적
〈기타 잇키-천황과 대결한 카리스마〉
마쓰모토 겐이치 지음·정선태, 오석철 옮김/교양인·6만5000원 기타 잇키(1883~1937·사진)는 ‘마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근대 일본에서 가장 기이하고 불온했던 혁명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1936년 전면적인 국가 개조와 군사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청년 장교들이 일으켰던 ‘2·26 쿠데타’의 사상적 지도자로서, 일본 우익 사상의 정점으로도 평가받는다. 일본의 우익 사상을 깊게 연구해 온 마쓰모토 겐이치가 쓴 <기타 잇키>는 기타의 인생과 사상의 행적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적·사상적 흐름까지 집요하게 쫓아, 그가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기타는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에 절대적인 천황 권력이 확립된 뒤, 역사의 반항아들이 주로 유배를 갔던 북쪽 지방의 사도 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에겐 천황의 절대 권력에 대해 민주주의적 개혁을 요구하며 아버지 세대가 벌였던 ‘자유민권운동’의 여파가 밀려왔고 자치 공동체의 성격이 강한 섬에서의 생활 또한 그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러다 1901년 사회민주당 창당 등 당시의 사회주의 흐름과 만난 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사회주의에서 찾는다. 계급 타파와 토지·자본의 공유, 국민주권, 평등주의 등 사회주의적 이상에 매료된 것이다.
그러나 기타는 국가라는 공동체를 중요하게 여긴 국가주의자이기도 했다. 1906년 스물네 살의 나이로 내놓은, 그의 사상의 집대성이라 할 만한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에서 그는 지배계급뿐 아니라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자들도 비판한다. 그는 “국가와 국민은 한 몸”이라는 ‘국체론’을 내세웠고, 사회주의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이상향으로서 국가를 강조했다. 토지와 생산기관의 공유를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기본 방향은 전통적인 사회주의와 다르지 않지만, 이를 이루기 위한 계급 투쟁은 곧 국가를 이루기 위한 투쟁과 같다고 본 것이다.
진화론에 따라 인류가 ‘소아’(小我·개인)에서 ‘대아’(大我·국가)로, 다시 ‘무아’(無我·세계 연방)로 가는 발전단계를 밟는다고 본 그는,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 사회주의·국가주의 투쟁이라고 했다. 이는 국제 계급연대를 통한 제국주의 배척을 주장한 당시 사회주의 조류와 다르게 제국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기타의 국체론은 메이지 유신 때부터 당시 일본을 지배하고 있던 ‘천황이 곧 국가’라는 복고적 국체론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국민이 국가가 되는 과정을 막고 있는 천황 중심의 국체론이 지배계급의 허구적인 논리라는 것을 까발린 것이다. 그는 천황을 ‘헌법 개정의 발언권을 가진 특권적 국가기관’ 정도로만 인식했다.
때문에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는 발행되자마자 금서로 찍혔고, 낙심한 기타는 중국으로 건너간다. 중국에서 ‘동양적 공화정’을 만들 수 있다면 일본의 ‘동양적 군주정’과 함께 서양 열강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쑨원·쑹자오런 등과 함께 중국혁명에 참여한다. 그러나 일본의 대륙 침공으로 반일 감정이 거세지면서, 1920년 초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그의 손에는 <일본개조법안대강>이 들려 있었다. 천황의 힘을 빌려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유재산 제한·귀족제도 폐지·노동자 권리 향상·국민 인권 옹호·대자본의 국유화 등 급진적인 혁명 목표들을 현실화한다는 내용의 혁명 강령이었다. 이 역시 발매·반포 금지 처분을 받았지만,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기타의 사상적 활동은 결국 1936년 ‘2·26 쿠데타’로 현실화된다. <개조법안>에 영향을 받은 청년 장교들이 전면적인 국가 개조를 주장하며 군 상층부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천황을 ‘이용한다’는 기타의 마키아벨리즘적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 장교들은 되레 쿠데타에 대한 천황의 재가를 기다리다가 실패하고 만다. 기타는 이들의 사상적 배후로 지목돼 총살형에 처해졌다. 기타 잇키의 사상과 삶은 우익이냐 좌익이냐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다층적이다. <개조법안>에 포함된 많은 항목들이 전후 연합국 점령 체제에서 대부분 실현됐다는 점에서는 민주주의를 강조한 면모가, 국체론 등 국가주의에 대한 집착에서는 파시즘 혁명가로서의 면모가 강하게 나타난다. 계급 투쟁과 사유재산 제한을 일관되게 주장한 면에서는 사회주의자로서의 성격이 뚜렷하다. 이렇게 다양한 면모의 기타를 되살려낸 지은이 마쓰모토는 머리말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혁명적 낭만주의자의 초상.’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마쓰모토 겐이치 지음·정선태, 오석철 옮김/교양인·6만5000원 기타 잇키(1883~1937·사진)는 ‘마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근대 일본에서 가장 기이하고 불온했던 혁명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1936년 전면적인 국가 개조와 군사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청년 장교들이 일으켰던 ‘2·26 쿠데타’의 사상적 지도자로서, 일본 우익 사상의 정점으로도 평가받는다. 일본의 우익 사상을 깊게 연구해 온 마쓰모토 겐이치가 쓴 <기타 잇키>는 기타의 인생과 사상의 행적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적·사상적 흐름까지 집요하게 쫓아, 그가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기타는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에 절대적인 천황 권력이 확립된 뒤, 역사의 반항아들이 주로 유배를 갔던 북쪽 지방의 사도 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에겐 천황의 절대 권력에 대해 민주주의적 개혁을 요구하며 아버지 세대가 벌였던 ‘자유민권운동’의 여파가 밀려왔고 자치 공동체의 성격이 강한 섬에서의 생활 또한 그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러다 1901년 사회민주당 창당 등 당시의 사회주의 흐름과 만난 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사회주의에서 찾는다. 계급 타파와 토지·자본의 공유, 국민주권, 평등주의 등 사회주의적 이상에 매료된 것이다.
기타 잇키(1883~1937)
때문에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는 발행되자마자 금서로 찍혔고, 낙심한 기타는 중국으로 건너간다. 중국에서 ‘동양적 공화정’을 만들 수 있다면 일본의 ‘동양적 군주정’과 함께 서양 열강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쑨원·쑹자오런 등과 함께 중국혁명에 참여한다. 그러나 일본의 대륙 침공으로 반일 감정이 거세지면서, 1920년 초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그의 손에는 <일본개조법안대강>이 들려 있었다. 천황의 힘을 빌려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유재산 제한·귀족제도 폐지·노동자 권리 향상·국민 인권 옹호·대자본의 국유화 등 급진적인 혁명 목표들을 현실화한다는 내용의 혁명 강령이었다. 이 역시 발매·반포 금지 처분을 받았지만,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기타의 사상적 활동은 결국 1936년 ‘2·26 쿠데타’로 현실화된다. <개조법안>에 영향을 받은 청년 장교들이 전면적인 국가 개조를 주장하며 군 상층부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천황을 ‘이용한다’는 기타의 마키아벨리즘적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 장교들은 되레 쿠데타에 대한 천황의 재가를 기다리다가 실패하고 만다. 기타는 이들의 사상적 배후로 지목돼 총살형에 처해졌다. 기타 잇키의 사상과 삶은 우익이냐 좌익이냐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다층적이다. <개조법안>에 포함된 많은 항목들이 전후 연합국 점령 체제에서 대부분 실현됐다는 점에서는 민주주의를 강조한 면모가, 국체론 등 국가주의에 대한 집착에서는 파시즘 혁명가로서의 면모가 강하게 나타난다. 계급 투쟁과 사유재산 제한을 일관되게 주장한 면에서는 사회주의자로서의 성격이 뚜렷하다. 이렇게 다양한 면모의 기타를 되살려낸 지은이 마쓰모토는 머리말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혁명적 낭만주의자의 초상.’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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