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공화국 하이델베르크>
독일의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
산업화 풍파에도 전통·자연 지켜
재개발 끊임없는 한국에 ‘본보기’
산업화 풍파에도 전통·자연 지켜
재개발 끊임없는 한국에 ‘본보기’
<정신의 공화국 하이델베르크>
김덕영 지음/신인문사·2만원 대학도시이자 관광도시로 알려져 있는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사진)는 “작지만 큰 도시”다. 인구는 14만명에 불과하지만 자연과 문화, 과거와 현재가 낭만적으로 잘 어우러진 도시이며, ‘하이델베르크 정신’, ‘하이델베르크 신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신과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운 도시다. <정신의 공화국 하이델베르크>는 독일에서 오랫동안 공부한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가 하이델베르크라는 도시 자체에 대해 쓴 ‘전기’(傳記)다. 그의 독특한 시도는 단지 하이델베르크가 어떤 곳인지 말해주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하이델베르크를 통해 독일, 더 넓게는 유럽의 삶과 정신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 짚어보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새기려 한다. 12세기에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한 하이델베르크는 라인 백작령이 돼 본격적인 발전을 이뤘고, 팔츠 선제후국으로 격상되며 정치적 위상이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치른 팔츠 상속 전쟁으로 크게 파괴된 뒤 몰락의 길을 걸었고, 19세기 바덴 대공국의 치하에서야 다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이런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이델베르크가 지켜온 핵심적인 정체성은 ‘대학도시’다. 팔츠 선제후국 때인 1386년 루프레히트 1세는 독일 최초의 대학으로 꼽히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세웠고, 이 대학은 19세기 바덴 대공국 시절 카를 프리드리히 대공의 적극적인 투자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뒀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정식 명칭이 ‘루프레히트 카를 대학’인 이유도 여기 있다.
대학을 품은 하이델베르크는 독일의 정신문화에 수많은 기여를 해왔다. 중세 때에는 칼뱅주의의 아성으로,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상의 비옥한 토양이 됐다. 특히 19세기에는 수많은 외국 학생들이 공부를 위해 하이델베르크를 찾아 ‘세계촌락’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도 이곳에서 철학을 가르쳤으며, 막스 베버, 카를 야스퍼스 등 수많은 학자들이 여기에 머물렀다. 생리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헤르만 폰 헬름홀츠 등 자연과학자들도 이곳에서 학문을 꽃피웠다. 지은이는 “산업화 시대에도 하이델베르크는 정신의 도시·대학의 도시라는 정체성을 지켜, 독일의 정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한다.
하이델베르크는 또한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져 낭만주의가 꽃핀 도시이기도 하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네카어강과 세 개의 봉우리로 도시를 감싸고 있는 산은 수려한 자연 풍광을 간직하고 있으며, 중세의 생활양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고풍스러운 도시는 그러한 자연과 잘 어울린다. 네카어강에 놓인 카를 테오도어 다리, 폐허가 되었지만 있는 그대로 보존하로 한 고성 등이 대표적이다. 전통과 현대, 자연과 도시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독일 전체로 볼 때, 정치·경제·문화의 기능이 단 한곳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국토 곳곳에 흩어져 나름의 구실을 하고 있는 모습과도 이어진다.
지은이는 이를 ‘나눔의 미학’이라고 부른다. 인구 14만명의 작은 도시가 대학을 중심으로 삼아 인간 정신의 꽃을 피운 세계촌락이 될 수 있었던 것, 600년 전에 만들어진 건물이 초현대식 건물과 조화를 이뤄 함께 서 있을 수 있는 것, 산업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유려한 자연경관에 손을 대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 등은 나눔의 미학에서 비롯됐다는 얘기다. 지은이는 위대한 독일의 시인 괴테가 독일 통일에 대해 했던 말 속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괴테는 “독일의 위대한 점은 놀랄 만한 국민 문화가 나라의 모든 지역에 골고루 퍼져 있다는 사실”이라며 통일 때문에 이러한 도시들이 독자적인 주권을 상실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하이델베르크에 대한 전기는 결국 우리 내부로 향한다. 작지만 큰 이 도시를 살펴보면서, 한국 사회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보자는 것이다. 지은이는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으로 ‘유물주의적 가치관’과 ‘양적 세계관’을 꼽는다. 물질적 가치만을 최고로 생각하고 모든 것을 양적인 잣대로 가르는 가치관이다. 끊임없는 재개발·재건축 속에 역사와 전통은 사라지고 오직 ‘지금’만을 쫓는 모습, 1등이 아닌 모든 것은 무가치하다고 치부하는 모습, 모든 기능을 서울에만 채워넣으려는 모습 등은 그런 가치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유럽의 도시를 통해 우리 내부를 들여다본다고 해서 ‘사대주의자’라고 비판할 것은 아니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평소에 보던 것과 ‘다른 눈’으로 바라봤을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인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은 되레 새로운 상상력의 동력을 준다. 지은이의 바람처럼, 자연과 어우러진 도산서원이 있는 경남 안동에서, 또는 다산 정약용이 사회개혁을 고뇌했던 유배의 땅 전남 강진에서 새로운 한국 대학과 대학도시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김덕영 지음/신인문사·2만원 대학도시이자 관광도시로 알려져 있는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사진)는 “작지만 큰 도시”다. 인구는 14만명에 불과하지만 자연과 문화, 과거와 현재가 낭만적으로 잘 어우러진 도시이며, ‘하이델베르크 정신’, ‘하이델베르크 신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신과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운 도시다. <정신의 공화국 하이델베르크>는 독일에서 오랫동안 공부한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가 하이델베르크라는 도시 자체에 대해 쓴 ‘전기’(傳記)다. 그의 독특한 시도는 단지 하이델베르크가 어떤 곳인지 말해주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하이델베르크를 통해 독일, 더 넓게는 유럽의 삶과 정신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 짚어보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새기려 한다. 12세기에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한 하이델베르크는 라인 백작령이 돼 본격적인 발전을 이뤘고, 팔츠 선제후국으로 격상되며 정치적 위상이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치른 팔츠 상속 전쟁으로 크게 파괴된 뒤 몰락의 길을 걸었고, 19세기 바덴 대공국의 치하에서야 다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이런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이델베르크가 지켜온 핵심적인 정체성은 ‘대학도시’다. 팔츠 선제후국 때인 1386년 루프레히트 1세는 독일 최초의 대학으로 꼽히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세웠고, 이 대학은 19세기 바덴 대공국 시절 카를 프리드리히 대공의 적극적인 투자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뒀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정식 명칭이 ‘루프레히트 카를 대학’인 이유도 여기 있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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