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여러분은 인간답게 살고 있나요?”

등록 2010-10-29 21:33

1968년 당시의 전태일.
1968년 당시의 전태일.
진화한 노동 착취에 저항하는
이시대 비정규직들의 ‘자화상’
‘전태일 분신 40주기’ 공동출판
〈너는 나다-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한다〉
손아람 외 지음/레디앙·후마니타스·삶이보이는창·철수와영희·1만3000원

“친우(親友)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40년 전 서울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가슴에 품고 불길 속에 산화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유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가 남긴 일기장 곳곳에서 그는 다른 모든 인간을 가리켜 ‘나의 전체의 일부’ 또는 ‘나의 또 다른 나’라고 불렀다. 결국 전태일 유서의 수신인은 우리 모두였으며, 스스로 깨닫지 못했더라도 우리 모두는 또 다른 나, 곧 전태일이었다. 평화시장의 전태일이 ‘열사’가 된 뒤 40년 동안 다른 모든 전태일들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전태일의 삶을 이어온 셈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전태일들도 평화시장의 전태일처럼 질문을 한 번 던져보자. “지금 인간답게 살고 있습니까?”

<너는 나다-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한다>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40주기’를 맞아 레디앙, 후마니타스, 삶이보이는창, 철수와영희 등 4개 출판사에서 공동으로 펴낸 책이다. 이번 출판사들의 공동 기획·투자·출판은 우리나라에서 첫 시도라고 한다. 책은 한 권이지만 출판사마다 자율적인 내용과 형식을 펼쳐, 마치 네 권의 책을 한꺼번에 보는 듯하다. 그렇지만 책 전체를 꿰뚫는 주제의식은 또렷하다. ‘우리 시대의 전태일은 어떻게 살고 있느냐’다.

스물다섯 살의 대학 졸업반 청년이 가계부를 써본다. 일주일에 3일은 편의점 야간 알바(아르바이트), 2일은 사무보조 알바를 하면서 한 달 동안 번 돈이 67만원. 방세·전기세·공과금으로 32만원, 옷하고 신발 사느라 2만원을 썼다. 택시 한 번 탄 적이 없는데 교통비로는 9만8000원, 휴대폰·인터넷 요금이 10만원 들었다. 아껴 먹는다고 했는데도 밥값으로 8만원이 넘게 들었다. 이것저것 계산해보니 4만5000원 적자. 술값 등 유흥비를 5만원 쓴 것이 타격이 컸단다. 지금도 편의점 야간 알바 때문에 다음날 오전 수업에 못 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알바 시간을 더 늘렸다간 공부를 전혀 못할 것 같다고 고민이다. 어젯밤에도 새벽에 찾아온 취객에게 시달리느라 늦잠을 잤다.

그의 청춘일기는 평화시장 전태일의 일기와 겹친다. “200원을 가지고 벌써 80원을 썼으니 아무리 절약을 해도 19일까지밖에 못 가겠구나. 20일날 인덕상회 98호집에 작업복 일을 임시 하러 가기로 했지만 민생고 해결 때문에 고민이로구나. 일은 하러 가기로 했지만 먹을 게 있어야 가지…”


〈너는 나다-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한다〉
〈너는 나다-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한다〉
전태일이 산화한 뒤 불붙듯 번진 노동운동은 40년 동안 많은 성과를 쟁취해냈다. 노동자 권익이 예전보다 크게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 손아람씨가 지적하듯 “시대는 변했고 자본주의는 진화했다.”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노동하는 전태일의 삶이 힘든 것만큼은 좀체 변하지 않는다. 특히 학생, 청년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사회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인간의 조건을 쟁취하기 위한 전태일의 투쟁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외주화로 인한 고용불안에 맞서다 해고돼, 1800일이 넘도록 부당해고 철회와 직접고용을 외치며 투쟁하고 있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40년 전 평화시장 전태일은 하루 열다섯 시간의 중노동을 줄이기 위해 투쟁했다. 그러나 오늘의 전태일들은 근무시간을 더 늘리기 위해 발버둥친다. 극장 안내원으로 일하며 스스로 학비를 버는 부산의 전태일은 하루 여섯 시간만 일한다. 여덟 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자에겐 의무적으로 식사비와 쉬는 시간을 줘야 하기 때문에, 극장에서 알바생들의 근무 시간을 여덟 시간 아래로 조정해 ‘돌려막는’ 것이다.

커피숍 알바로 일하는 ‘레랑스’는 “내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도 다른 누군가가 생존을 위해 이 자리를 메울 것이고, 내가 제기했던 문제들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그 친구가 다시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때까지 숙성되겠지”라고 말한다.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 많다’고 냉혹하게 말하는 오늘날 비정규 노동의 적나라한 실태다. 노동운동가 하종강씨는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회사에 뭔가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리는 것이 비정규직 제도”라고 비판한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 어떻게든 생존할 거니까.” 청년 구직자, 아르바이트생, 비정규직으로 이뤄진 우리나라 첫 세대별 노동조합 청년유니온의 김영경 위원장은 이렇게 말하며 스스로를 북돋는다. 이 책의 기획자들은 “전태일이 살아 돌아온다면 대규모 집회가 열리는 광장에서 마이크를 잡는 대신, 편의점 같은 곳에 있는 알바 전태일들을 만나러 갈 것 같다”고 말한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삶의 조건에 맞서 싸우고 있는 오늘의 모든 전태일에겐, 또 다른 전태일의 응원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40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태일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살아온 이유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