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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조선후기를 지켜낸 힘 ‘대동법’

등록 2010-11-05 20:18수정 2010-11-05 20:49

선조 때부터 공물변통을 주장한 이이(왼쪽)는 조선 중기 개혁의 이론적 밑그림을 그렸다.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대동법 시행을 촉구한 김육(왼쪽 둘째)과 호서대동법이 실시될 때 호조 판서로서 실무를 지휘한 이시방(셋째)은 대동법 시행의 주역으로 꼽힌다.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오른쪽)도 호서대동법의 효과가 입증된 뒤 이시방을 도와 호남대동법 제정에 힘썼다. 역사비평사 제공
선조 때부터 공물변통을 주장한 이이(왼쪽)는 조선 중기 개혁의 이론적 밑그림을 그렸다.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대동법 시행을 촉구한 김육(왼쪽 둘째)과 호서대동법이 실시될 때 호조 판서로서 실무를 지휘한 이시방(셋째)은 대동법 시행의 주역으로 꼽힌다.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오른쪽)도 호서대동법의 효과가 입증된 뒤 이시방을 도와 호남대동법 제정에 힘썼다. 역사비평사 제공
부조리한 공납폐해 고치려
100년간 꾸준한 개혁 단행
오늘날 민생에 큰 가르침 줘
<대동법-조선 최고의 개혁>
이정철 지음/역사비평사·2만4000원

<대동법-조선 최고의 개혁>
<대동법-조선 최고의 개혁>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두 차례의 외침을 겪은 뒤인 조선 후기를 가리켜 ‘봉건제 해체기’라고 부르곤 한다. 쉽게 말해 망해가던 시기라는 얘기다. 과연 적절한 평가일까? 조선은 14세기 말에 건국해 20세기 초까지 500년 가까이 유지돼, 동아시아 전근대 국가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체제를 유지한 나라로 꼽힌다. 게다가 임진왜란 뒤로도 300년 가까이 그 체제를 지켜갔다. 중국의 성공한 왕조들인 당·송·명·청 등의 천수는 대체로 300년 남짓이었다. 이렇게 보면, 조선 후기는 해체되어 가던 시기가 아니라 체제를 유지하는 동력이 끊임없이 작동했던 시기라고 평가하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체제가 유지될 수 있던 동력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대동법-조선 최고의 개혁>을 쓴 이정철 박사는 그 답을 대동법에서 찾는다. 흔히 대동법은 조선 중기에 시행된 조세 제도로, 이전까지 각 지방에서 중앙에 현물로 바쳐야 했던 공물을 쌀로 대신 낼 수 있게 만든 제도라고 알려져 있다. 대동법 자체와 관련된 논의의 흐름을 치밀하게 뜯어본 지은이는, 대동법은 단지 하나의 조세정책이 아니라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해 민생을 증진시키려 했던 개혁담론이었고 시대정신이었다고 말한다.

조선의 재정체계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조(租)·용(庸)·조(調) 체계를 따른다. 각각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 노동력 수취, 현물로 받는 지역 특산물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토지(전결·田結)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사람(호구·戶口)을 기준으로 삼아 따라 부과되는 조(調), 곧 공납(貢納)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 큰 사회문제로 발전했다. 법적으로는 현물을 내라고 되어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쌀이나 무명으로 대납이 가능해졌으며, 이에 따라 중간 단계에서 백성들이 부담해야 할 몫을 터무니없이 키우거나, 여러 차례 거둬들이는 첩징·가징의 폐단들이 발생한 것이다. 그 결과로 백성들에겐 세금보다 공납이 더 무겁게 부과되는데도 국가 재정은 제대로 확충되지 않는 모순이 일어났다.

조선 최고의 경세가로 꼽히는 율곡 이이는 선조 때부터 공물을 포함한 모든 세금 항목을 쌀로 받자는 ‘공물변통’을 주장했고, 그러한 수취 구조의 개혁만이 국가재정의 확보로 이어질 것이라고 봤다. 그의 공물변통안은 당시 지식인들과 관료들이 함께 공감했던 일종의 시대정신이었고, 그 뒤로 대동법 실시론과 공납물의 삭감을 먼저 하자는 공안개정론으로 분화됐다.

임진왜란 뒤 피폐한 민생의 회복을 위해 삼도대동청 설립으로 처음 시도됐던 대동법은, 병자호란을 거친 뒤 효종·현종 때를 이어가며 뿌리를 내렸다. 100년에 걸친 대동법의 확립 과정은, 국가 재정의 적정 규모, 지역별 재정 부담의 편차, 정책의 현실적 효과 등 다양한 주제를 두고 국왕을 포함한 정치세력들이 서로 꾸준하게 벌인 정책 논쟁의 결과다. 이 과정에는 기존 조세 체제로 이득을 누리던 기득권 세력들과의 마찰, 청나라가 공물 요구로 재정을 압박하던 국제 정치 상황에 대한 고려 등도 포함되어 있다.

지은이가 볼 때 대동법의 핵심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공물의 부과 기준을 사람이 아닌 토지로 삼고 수취 수단을 쌀로 정했다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이미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던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대동법의 진정한 의미는 “그 두 가지가 법으로 규정됨으로써 양입위출(量入爲出: 확보된 세입에 따라 지출하는 것)의 객관적 지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라고 한다. 곧 대동법 실시는 국가가 백성들로부터 거둘 수 있는 재정 규모를 미리 예측하고 그에 맞춰 지출을 짜는 것이 가능하게 해준 ‘제도 개혁’인 것이다. 대동법 실시에 따라 백성들이 부담할 세금은 기존의 5분의 1가량으로 줄었다.

지은이는 대동법에서 조선시대 경세론의 핵심을 읽는다. 그는 “‘이식위천’(以食爲天: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을 강조한 조선의 지배층은 자신이 믿은 성리학 이념을 민생 문제와 관련시켜 고민했다”고 말한다. 반계 유형원은 공물을 쌀로 내는 제도의 정당성을 따지기 위해, 옛 제도를 연구해 “제후가 천자에게 바치는 봉헌은 예(禮)를 표현하는 것일 뿐, 토지에서 10분의 1 세금만 내면 되는 백성들에게 따로 부담을 지울 순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자신의 학문과 믿음을 정치나 사상 속에 가두지 않고, 생활과 삶의 양식으로까지 확장하려는 태도라는 것이다. 대동법과 같이 제도와 현실 사이에 벌어진 틈을 다시 묶어내는 ‘온건한 제도 개혁’이 가능했던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지은이는 “조선시대 성리학 지배체제는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보다 더 잘 확립된 제도”라고 말한다. 백성들이 사람답게 먹고사는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오늘날의 글 배우고 벼슬하는 사람들이 가슴 아프게 들어야 할 충고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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