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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어찌 잊으리, 노동자 배달호의 불꽃을

등록 2011-01-14 20:29

인간의 꿈
김순천 지음/후마니타스·1만원
<인간의 꿈>은 2003년 1월9일 노동운동에 대한 회사의 온갖 탄압 조처에 신음하다 스스로 몸에 불을 놓아 세상을 뜬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의 한평생을 그린 평전이다. 구속과 수배, 당시로선 ‘신종 노동탄압’ 수단이었던 손해배상 가압류 등으로 괴로워하던 배달호씨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남겼다. 이랜드 노동자들의 이야기인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를 썼던 르포작가 김순천씨는 유족들과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평범한 꿈을 안고 있던 평범한 인간이었던 배달호의 삶과 죽음을 쫓아갔다.

배달호가 두산중공업의 전신인 한국중공업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1981년. 그의 나이는 스물여덟이었다. 제대 뒤 부산의 동호전기에 취직한 뒤 줄곧 작은 기업에서만 일했던 그는 큰 회사에 다니게 되어 마음이 놓였다고 한다. 여섯 형제가 있는 가난한 가족을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중공업에 다니면서 황길영씨를 만나 결혼을 했고 두 딸도 낳았다. 두살 터울이었던 두 딸을 끔찍하게도 아꼈다고 한다.

배달호는 사람에 대한 정이 많고 그리움도 많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군사정권 시절 권위적이고 비인간적이던 노동현장은 점차 변화에 부딪혔고, 1985년에는 한국중공업에 처음으로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그 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겪으며 노동운동이 크게 성장했고, 배달호는 주로 대의원으로서 노조활동에 열심히 참여했다. 자전거와 호루라기는 그를 떠올리게 하는 주요 소품이다. 틈만 나면 자전거를 타고 공장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들을 만났으며, 호루라기를 불며 현장 동료들을 모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왕성한 노조활동은 1995년 파업권을 무력화시키는 ‘일방중재’ 조항을 없애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1993년께 어느 노동조합 행사에 참여한 고 배달호씨가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다. “그는 동료들과 놀러 오면 항상 즐겁고 활기 있게 흥을 잘 돋우는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장 안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호루라기를 불며 사람들을 모여들게 했던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고 했다.  후마니타스 제공
1993년께 어느 노동조합 행사에 참여한 고 배달호씨가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다. “그는 동료들과 놀러 오면 항상 즐겁고 활기 있게 흥을 잘 돋우는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장 안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호루라기를 불며 사람들을 모여들게 했던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고 했다. 후마니타스 제공

그러나 1998년 한국중공업이 민영화의 길을 밟고, 2000년 두산에 인수되면서 비극의 서막이 오른다. 단돈 3057억원으로 한중을 인수해 재계 서열 8위로 급부상한 두산은 2001년 일방적인 희망퇴직을 발표하고 다양한 방법의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또 노조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높여나갔다. 2001년 단체협약에서 합의했던 집단교섭에 두산은 이유 없이 불참했고, 노조는 47일 동안 전면 파업으로 여기에 맞섰다. 회사는 대량징계와 고소·고발, 가압류 등 노조를 무력화시키는 여러 방법들을 동원했다. 예컨대 파업기간에 집에 있으면 재택근무로 인정해 일당을 주고,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무단결근으로 처리해 불이익을 줬다. 또 조합원들과 가족들을 대상으로 회유·포섭 작업을 벌였다.

회사는 2002년 6월 노조 간부 13명을 업무방해 및 폭력으로 고소·고발했고, 여기엔 배달호도 포함돼 구속·수감됐다. 7월에는 노동조합과 조합원, 노조 간부 42명에게 65억원에 달하는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8월에는 620명의 조합원들에게 징계를 내렸고 배달호는 정직 3개월을 처분받았다. 이런 탄압 조처들은 숨도 못 쉴 정도로 노동자들을 몰아붙였다. 2002년 12월 복직한 배달호는 “손배 가압류를 풀어줄 테니 공장을 떠나라”는 회유를 받았다. 이미 집도 차압당하고 생활비조차 끊긴 상태였다.

결국 배달호는 1월9일 노동자 광장 한 귀퉁이에서 아무도 모르게 자기 몸에 불을 질렀다. “두산이 해도 너무 한다. 해고자 18명, 징계자 90명 정도 재산 가압류 급여 가압류 노동조합 말살 악랄한 정책으로 우리가 여기서 밀려난다면 전 사원의 고용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 두산의 노동조합 말살 정책 분명히 드러나 있다. (…) 공정해야 할 재판부가 절차를 거쳐 쟁의행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불법이라니 가진 자의 법이 아닌가.” 그가 남긴 유서엔 그가 겪은 고통이 절절하게 드러나 있다. 실제로 그가 죽은 다음날인 10일은 그의 복직 뒤 첫 급여일이었는데, 가압류 때문에 월급봉투에 찍힌 돈은 단돈 2만5000원이었다.

지은이는 배달호가 떠난 뒤 가족을 상대로 한 회사의 회유와 압력, 노조와 회사의 대치, 극심한 노동탄압에 대한 노동·시민사회의 분노와 연대 등 65일 동안의 전개 과정도 그렸다.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회사 안에 그대로 모셔져 있던 시신을 치우라며 회사가 유족들을 상대로 ‘시신 가처분’을 신청하고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한 것은 가장 기가 막힌 현실의 한 조각이다.

2003년 3월14일, 겨우겨우 이뤄진 회사와의 합의로 배달호의 장례가 치러졌다. 지은이는 배달호가 묻힌 양산 솔발산 공원묘지를 찾아, 배달호와 나란히 묻혀 있는 다른 노동열사들을 하나씩 되새긴다. 배달호의 장례 때 찾아와 방명록에 서명까지 했던 김주익은 같은 해 10월 한진중공업의 손배가압류와 부당노동행위에 항의해 목을 매 자결했다. 같은 회사 동료 곽재규도 목숨을 끊었고, 그 뒤에 누운 박일수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는 “체불 임금을 달라”는 유서를 남겼다. 지은이는 이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묻는다. 이들이 스스로의 삶을 던져서 빌었던 소망, 곧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아직도 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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