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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절제되고 은밀한 그녀들의 따돌림

등록 2011-03-11 21:32

<소녀들의 심리학> 내용을 바탕으로 2005년 만들어진 미국 텔레비전 드라마 <오드 걸 아웃>(Odd Girl Out)의 포스터. 사춘기 소녀들 세계의 은밀한 따돌림과 파벌 다툼을 다루고 있다.  양철북 제공
<소녀들의 심리학> 내용을 바탕으로 2005년 만들어진 미국 텔레비전 드라마 <오드 걸 아웃>(Odd Girl Out)의 포스터. 사춘기 소녀들 세계의 은밀한 따돌림과 파벌 다툼을 다루고 있다. 양철북 제공
소녀들의 심리학레이철 시먼스 지음·정연희 옮김/양철북·1만5000원

친한 친구일수록 더욱 가혹한
10대 여성들의 ‘공격문화’ 분석
‘착한여자 이데올로기’ 벗어야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알 정도로 친한 두 소녀가 어느 날부터 서로 말하지 않는 사이가 된다. 한쪽은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상대방에 대한 험담이 적힌 쪽지를 돌리고 헛소문을 퍼뜨리는 등 은밀하지만 적극적인 따돌림에 나선다. 따돌림당하는 쪽은 친구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지만 도대체 왜 따돌림을 당하는지 그 이유조차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주모자인 친구에게 “내가 네게 뭘 잘못했니?” 물어보지만, 그저 “아니”라는 짧은 대답과 찬바람 나는 외면만이 돌아올 뿐이다. 조용하고 깔끔한 이런 따돌림은 교사나 부모 등 어른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다. 결국 자기 안에 꾹꾹 눌러담을 수밖에 없지만, 따돌림의 기억과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소녀들의 심리학레이철 시먼스 지음·정연희 옮김/양철북·1만5000원
소녀들의 심리학레이철 시먼스 지음·정연희 옮김/양철북·1만5000원
<소녀들의 심리학-그들은 어떻게 친구가 되고 왜 등을 돌리는가>는 ‘소녀’라 불리는 청소년기 여성들의 따돌림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흔히 거침없는 신체적 폭력으로 나타나기에 어른들의 눈에 잘 띄는 소년들 사이의 갈등과 따돌림은 그동안 많이 다뤄져왔다. 그러나 조용하고 은밀하게 이뤄지는 소녀들 사이의 갈등과 따돌림은 거의 연구된 바가 없다. 여성학과 정치학을 공부한 지은이 레이철 시먼스가 2002년 내놓은 이 책은 300여명의 폭넓은 인터뷰를 통해 그동안 묻혀 있던 소녀들의 공격적 심리의 실체를 끄집어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 따돌림을 당했던 자신의 기억이, 많은 여성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기억이라는 사실에 놀라 이 주제를 파고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터뷰 대상자들이 쏟아낸 따돌림의 기억들 속에는 비교적 일관된 모습과 흐름이 있다. 소년들이 몸이나 말을 통해 직접적으로 서로를 공격하는 데 반해, 소녀들은 서로의 관계를 이용해 간접적이고 사회적인 공격을 펼친다. 뒤에서 흉을 보거나 상대에 대해 나쁜 소문을 내고, 다른 친구들을 조종해 고통을 가하는 것 등이다. 또 소년들이 잘 모르거나 조금 아는 상대를 대상으로 공격성을 드러내는 반면, 소녀들은 둘도 없이 친했던 친구들에게 공격을 가한다.

지은이는 기존의 연구 결과 등을 참조해, 소녀들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대체공격’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내놓는다. 지은이는 “누구하고나 ‘완벽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착한 여자로 키워지기 때문에, 소녀들은 갈등이 있을 때 타협하는 방법을 모른다”고 한다. 소년들은 관계의 유지보다 갈등의 해결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때론 물리적인 폭력까지 쓸 정도로 거침없이 자신의 공격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관계를 잃어버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소녀들은 갈등의 씨앗이 될 만한 행동들을 스스로 억누르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관계 자체를 무기로 삼아 서로를 은밀하게 공격하는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갈등의 씨앗이 되는 경쟁심·질투·분노와 같은 욕구와 욕망은 사실 성별에 관계없이 보편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소년들과 소녀들의 공격 문화는 어째서 이처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일까? 지은이는 그 답을 ‘문화의 이중잣대’ 속에서 찾는다. 지금은 여성의 진출이 우주까지 뻗어나가는 시대지만, 소녀들은 여전히 “겸손과 절제가 여성성의 본질”이라는 이데올로기 속에 갇혀 있다는 지적이다. 곧 ‘착한 여자가 되라’는 사회문화적인 강요 아래 자연스러운 자기 주장과 자기 표현을 억누르는 왜곡된 구조가 문제라는 것이다. “자기가 최고인 줄 알면 공격당한다”, “(어른들은) 우리가 19세기 소녀처럼 행동하기를 바란다”, “친구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남의 잘못을 따지지 않는다”는 소녀들의 증언은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욕구와 욕망을 통제받고 있는 그들의 상황을 드러내어준다.

따라서 지은이는 먼저 “소녀들의 은밀한 공격 문화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뒤이어 부모와 교사, 교육당국, 그리고 당사자인 소녀들에게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해결책들을 내놓는다. 그 핵심은 ‘욕구와 욕망을 억누르고 착한 소녀가 되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벗어던지는 것이다. 지은이는 “관계는 선택적이고 갈등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이해할 때, 이상적인 관계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집착을 강요하는 사회적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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