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
매튜 스튜어트 지음·석기용 옮김/교양인·2만7000원
‘인간=신’ 믿는 라이프니츠
‘신은 곧 자연’이란 스피노자
다락방에서 세계 바꾼 토론
‘신은 곧 자연’이란 스피노자
다락방에서 세계 바꾼 토론
1676년 11월, 미적분의 고안자이며 다방면의 학문적 성취로 유명한 젊은 철학자 빌헬름 라이프니츠(왼쪽)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어느 작은 벽돌집의 2층 다락방을 몰래 찾았다. 그를 맞이한 사람은 놀랍게도 유대인 공동체와 기독교에서 이중으로 추방돼, 렌즈를 깎으며 글을 쓰던 당대 ‘가장 불온한 사상가’ 바뤼흐 스피노자(오른쪽)였다. ‘잘나가던’ 청년 정객 라이프니츠는 왜 추방자 스피노자를 만나는 모험을 벌였을까?
두 사람의 만남은 라이프니츠가 남긴 ‘가장 완벽한 존재가 존재한다’는 문건의 여백에 메모로만 기록되어 있다. 라이프니츠 스스로 이 문건을 스피노자에게 직접 읽어줬다는 것.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는 그 구체적 내용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 짧은 만남의 기록을 꼬투리로 삼아, 17세기를 대표하는 두 철학자의 사상적 대결을 펼쳐보이는 책이다. 철학저술가 매튜 스튜어트는 평전처럼 두 사람의 삶과 사상을 소개해주는 한편, 난해한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쉽게 읽히도록 풀어냈다.
17세기 상업적으로 가장 번성했던 네덜란드에서 유대인으로 자란 스피노자는 합리적 이성에 따라 신에 대한 중세적 전통을 모두 거부했던 사상적 혁명가였다. “신은 곧 자연”이라며 신을 만물의 외부에서 인간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타동적 존재가 아니라 만물에 내제한 ‘실체’라고 파악한 스피노자의 사유는, 인간을 광대한 자연 속에 보잘것없는 신세로 끌어내렸다.
특별한 의미를 약속받지 못한 인간은 근대적 ‘개인’이 대두되는 출발점이었다. 자연에 내던져진 인간은 과연 무엇으로 특별해질 수 있을 것인가? 개인의 욕망과 마음에 주목하고, 능동적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을 강조했던 스피노자의 철학은 앞으로 다가올 근대적 세계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됐다고 지은이는 풀이한다.
궁정에서 출세의 계단을 밟아가던 야심만만한 철학자 라이프니츠 또한 합리적 이성의 도래를 예견했다. 그러나 그는 스피노자가 제시한 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신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만한 가치가 있는 신이란,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라야 한다”며 스피노자를 반박했다. 직접 찾아가 완벽한 존재로서 신을 논증하려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상에는 단 하나의 신, 곧 자연만이 존재한다’는 스피노자의 사유에 맞서, 라이프니츠는 ‘모나드’(monad, 단일성)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인간은 새로운 신이라고 라이프니츠는 선포한다. 우리들 모두가 작은 신성을 지닌, 하나의 우주라고 말한다.”
지은이는 두 사람의 철학적 결투가 결국 그 뒤로 펼쳐진 서양 근대 사상의 서로 다른 양극단을 보여줬다고 풀이한다. “스피노자는 행복과 덕이 오로지 우리가 수중에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라이프니츠는 행복과 덕이 저 너머에 있는 무언가에 달려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세속적인 세계에서 인간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고민한, 근대성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의 선두주자였다고 한다. “그의 사상은 근대 과학의 버팀목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근대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정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근본적인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반면 스피노자의 사상이 가져올 무정부주의적 상황을 두려워한 라이프니츠는 근대성에 대한 반동적 반응을 대변한다. 그의 사상엔 더이상 목적이 없는 세상에 대한 우려, 인간 특권의 상실에 대한 위기감 등이 녹아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그동안 서양 근대 철학의 지배적인 형태는 라이프니츠가 제기한 반동적 철학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은근히 스피노자의 손을 들어준다. 이미 스피노자가 “행복을 찾기 위해 이 세계에서 더 많은 것을 기대할 필요가 없다”는 진리를 제시했지만, 인류는 지난 300년 동안 라이프니츠적 철학만 반복해왔다는 비판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스피노자가 살았던 네덜란드 헤이그의 2층 다락방의 모습. 라이프니츠는 1676년 이곳을 찾아와 스피노자를 만났으며, 자신이 출간한 문건에 스피노자를 만나서 문건을 직접 읽어줬다는 기록을 남겼다. 교양인 제공
철학자 빌헬름 라이프니츠(왼쪽)와 바뤼흐 스피노자(오른쪽)
지은이는 그동안 서양 근대 철학의 지배적인 형태는 라이프니츠가 제기한 반동적 철학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은근히 스피노자의 손을 들어준다. 이미 스피노자가 “행복을 찾기 위해 이 세계에서 더 많은 것을 기대할 필요가 없다”는 진리를 제시했지만, 인류는 지난 300년 동안 라이프니츠적 철학만 반복해왔다는 비판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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