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에메 세제르, 듀보이스, 프란츠 파농
아프리카 흑인 고통 담은 ‘귀향수첩’
비평담론으로 변질 비판 ‘검은 역사…’
문학속 탈식민주의 맥락 짚은 ‘제국…’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연구 독립’
비평담론으로 변질 비판 ‘검은 역사…’
문학속 탈식민주의 맥락 짚은 ‘제국…’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연구 독립’
‘탈식민주의’는 비교적 최근에야 틀을 갖춘 담론이지만, 짧은 시간 동안 집중 조명을 받은 탓인지 식상한 느낌을 준다. 이는 탈식민주의가 1990년대 후반 서구에서 유행한 각종 포스트모더니즘 담론과 함께 국내에 소개된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우리의 식민지적 현실을 사유하는 계기라기보다는, 탈국가·탈민족·탈근대 등 ‘해체와 탈주’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다양하고 현란한 서구 포스트모더니즘 이론들 가운데 하나로서 다가왔던 것이다.
이처럼 탈식민주의에 들어 있는 서구 중심주의의 물을 빼고, 탈식민주의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책들이 최근 잇따라 출간됐다. ‘에메 세제르 선집’은 아프리카 탈식민주의 사상의 선구자로 꼽히는 에메 세제르(왼쪽)의 저술을 선별해 묶은 기획이다. 탈식민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한 이론서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과 서구 우월주의를 담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태풍>을 탈식민주의적 문제의식으로 재구성한 <어떤 태풍>, 그리고 아프리카 흑인들의 고통을 담은 서사시 <귀향 수첩> 등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경원 연세대 교양학부 교수가 쓴 <검은 역사 하얀 이론-탈식민주의의 계보와 정체성>과 이석구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가 쓴 <제국과 민족국가 사이에서-탈식민시대 영어권 문학 다시 읽기>는 각각 탈식민주의의 계보와 탈식민시대의 영어권 문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파고들어간 저작이다.
<검은 역사 하얀 이론>은 탈식민주의의 전체 흐름과 주요 논쟁점을 짚어준다. 지은이는 서구의 지식계와 자본에 기대고 있는 탈식민주의에 대한 비판들을 소개하며, “탈식민주의가 더 이상 서구화되지 않고 제3세계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역할을 수행하려면 원래의 뿌리로부터 단절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은이가 말하는 뿌리란, 듀보이스(가운데), 세제르, 프란츠 파농(오른쪽) 등이 이어온 반식민적 민족주의다. “탈식민주의를 문자 그대로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 또는 담론적 실천으로 규정한다면, (…) 아프리카 흑인들이 담론적 주체로서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의 극복을 추구한 범아프리카주의와 ‘네그리튀드’는 가장 중요한 줄기”라는 것이다.
범아프리카주의는 1900년부터 1974년까지 벌어진, 모든 아프리카 흑인들의 단합을 통한 정치적 자결과 경제적 자립을 추구한 운동이다.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흑인인 듀보이스는 백인우월주의에 맞서 흑인민족주의를 주창하며 이 운동을 주도했다. ‘흑인성’ 또는 ‘흑인인 상태’ 등을 뜻하는 ‘네그리튀드’는 1930년대 파리에 유학중이던 프랑스 식민지 출신 흑인 학생들이 주도한 흑인정체성 회복운동을 가리킨다. 세제르는 이 운동의 주창자로서 백인과 구별되는 흑인 고유의 정신과 주체성을 통해 식민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
지은이는 이들의 정신이 혁명적 탈식민주의 실천가였던 파농으로 이어진다고 봤다. 실제 세제르는 파농의 중학교 때 스승이기도 했다.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핵심 인물로서 프랑스 식민지배에 주도적으로 저항했던 파농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 등을 주무기로 삼아 반식민주의·반자본주의 투쟁을 펼쳤다. 특히 반식민주의에서 출발해 민중주의로 가는 과정으로서의 민족주의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들이 씨앗을 뿌린 탈식민주의가 뒷날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계기로 서구 중심적인 포스트모더니즘 기획에 편입됐다는 것이 지은이가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다. 현실을 변혁시키는 것과 무관한 비평 담론으로 흘러가며 탈식민주의 고유의 저항성과 전복성이 퇴색됐다는 것이다.
탈식민주의의 원류가 지닌 날카로운 저항성과 전복성은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 등 세제르의 저술에서 생생하게 읽어낼 수 있다. 무엇보다 계급과 자본의 격차가 발생할 때 타자화와 차별이 등장하고 그것이 식민주의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식민주의를 계급과 자본의 문제로 규정하는 세제르의 치열한 현실 인식과 통찰력이 돋보인다. “네그리튀드는 이제 더 이상 두개골의 지표도/ 혈청도 체세포도 아니다./ 우리는 고통이라는 잣대로만 잴 수 있는/ 인간이다”(<귀향 수첩>)와 같은 문구를 보라. 세제르가 강조하는 흑인의 민족적 정체성이 단순히 혈통·문화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같은 고통을 겪는 피억압자들이 연대하는 ‘정치적 의식’에 따른 것임을 읽을 수 있다. 억압과 지배가 있는 곳에 연대와 저항이 있다는 불변의 진리도 내포하고 있다.
<제국과 민족국가 사이에서>는 아모스 투투올라, 응구기, 아체베와 같은 영어권 아프리카 작가들을 비롯해 원주민 문제를 다룬 작가들, 디아스포라와 이민 2세대 작가들 등 9개국 출신 22명의 영어권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 33편을 연구하고, 그 속에 담긴 탈식민주의적 맥락을 짚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 어떤 태풍, 귀향 수첩
에메 세제르 지음·이석호 옮김/그린비·각 권 1만원
검은 역사 하얀 이론-탈식민주의의 계보와 정체성
이경원 지음/한길사·2만8000원
제국과 민족국가 사이에서-탈식민시대 영어권 문학 다시 읽기
이석구 지음/한길사·2만8000원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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