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시대 긴급조치 1호를 위반했다는 혐의로 옥살이까지 했던 오종상씨가 지난 12월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재심 선고에서 36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긴급조치에 대한 위헌 판결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워 헌정질서와 민주주의를 역행한 유신헌법과 유신체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로 이어진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자유로운 민주적 기본질서’
독일기본법 조항서 따와
유신때 반공논리로 적용
오늘날엔 복지·형평 반대
시장만능주의 추종 논리로
독일기본법 조항서 따와
유신때 반공논리로 적용
오늘날엔 복지·형평 반대
시장만능주의 추종 논리로
박명림 교수 논문서 허구성 비판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놓고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지난주에는 <조선일보>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초청으로 방한했던 래리 다이아몬드 스탠퍼드대 교수의 말을 인용해 크게 보도했다. “자유민주주의는 더욱 질 높은, 심화된 민주주의”라는 그의 말을 끌어들여, 민주주의보다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결정적인 물음이 빠져 있다. 한국의 일부 세력이 주장해온 자유민주주의가 과연 다이아몬드 교수가 말한 자유민주주의와 같은 것이냐는 물음이다.
박명림(사진) 연세대 교수는 계간지 <역사비평> 가을호에 실을 ‘박정희 시기의 헌법 정신과 내용의 해석’이란 논문에서 박정희 시대의 헌법 문제를 심층적으로 들여다보고,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허구적인 성격을 파헤쳤다.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과거에나 지금에나 민주주의 정신과 거꾸로 가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한국 자유민주주의는 박정희 시대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1972년 영구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만들 때,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이 헌법 전문에 처음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인 1948년 건국헌법 때부터 1969년 3선헌법에 이르기까지 헌법 전문의 같은 부분에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규정과는 거리가 먼 ‘민주주의 제(諸)제도’란 말이 쓰였다.
박 교수는 특히 유신헌법 때 들어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에 대해 “우리가 흔히 한국의 국가정체성으로 인식하고 추구해오던, 냉전시대 반공주의로 이해했던 좁은 의미의 자유민주주의(liberal-democracy)와 다르다”고 지적한다. 이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것은 현행 헌법에 대한 법제처의 공식 영어번역이라고 한다. 법제처 공식 누리집을 보면, 전문과 제4조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the liberal-democratic basic order’가 아니라 ‘the free and democratic basic order’로 옮기고 있다.
이는 유신헌법이 참조했던 1949년 독일기본법의 ‘자유로운 민주적 기본질서’ (freiheitliche demokratische Grundordnung)라는 독일어 원문에 충실하게 옮긴 것이다. 이 조항은 파시즘과 전체주의, 공산주의 등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적극 방어하고자 만들어진 조항이다. 그런데 한국의 유신헌법은 이 조항을 따오면서 본래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를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의 협소한 냉전시대 반공주의의 논리로만 적용했고, 실질적으로는 오히려 본뜻과 정반대로 자유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독재정권을 정당화하는 데 썼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박정희 정권은 ‘반공’을 위해서라며 유신헌법을 내세웠으나, 여기에서마저 자가당착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비판했다. 유신쿠데타를 앞둔 박정희 정권이 ‘헌정변개’를 사전에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인 북한에 통고해주는 등의 모습을 보인 것이 단적인 사례라고 한다. 유신헌법과 함께 만들어진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반공도 뭣도 아닌, 오로지 독재정권을 정당화하려는 수단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강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박 교수는 “과거에 권위주의를 뒷받침했던 자유민주주의가 오늘날에는 복지·형평·포용·균등 등을 반대하고 시장만능주의를 추종하는 논리로 쓰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 또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고 한다.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흐름을 보면, 시장만능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경제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로버트 달, 조지프 슘페터와 같은 주요 자유민주주의 이론가들의 행보에서도 이런 경향성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래리 다이아몬드도 지난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경제 민주화’”라고 말하기도 했다.
박 교수는 “유신헌법이 건국헌법과 건국정체성을 부인하고 만들어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헌법조항은 우리가 아직도 유신의 잔재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며 “이를 바로잡기 위해 헌법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규정을 애초 건국헌법의 정신에 맞게 ‘민주주의 제(諸)제도’나 ‘민주적’으로 복원·통일하거나, 독일기본법에 담겨 있는 본뜻대로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로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건국헌법처럼 사회민주주의를 헌법정신으로 규정하고 지향할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보수적 자유민주주의자로 박정희 정권과 그 뒤 신군부에 의해 지속적으로 탄압을 받았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유신쿠데타에 대해 “박정희가 권위주의를 제도화한다면 그와 김일성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맹비난하기도 했다. 사진은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가 1983년 가택연금된 가운데 5·17 3주년을 맞아 단식을 벌이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강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박 교수는 “과거에 권위주의를 뒷받침했던 자유민주주의가 오늘날에는 복지·형평·포용·균등 등을 반대하고 시장만능주의를 추종하는 논리로 쓰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 또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고 한다.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흐름을 보면, 시장만능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경제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로버트 달, 조지프 슘페터와 같은 주요 자유민주주의 이론가들의 행보에서도 이런 경향성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래리 다이아몬드도 지난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경제 민주화’”라고 말하기도 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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