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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18세기초엔 ‘낭독’이 독서의 대세였는데…

등록 2011-09-20 20:34

필사본 소설을 대여해주고 돈을 벌었던 조선후기의 책 대여점 ‘세책방’이 배경으로 나온 영화 <음란서생>의 한 장면. 조선후기에 서울이 도시화되면서 책이 상품으로 인식되는 등 독서문화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윤정안 서울시립대 강사는 이런 변화가 기존의 낭독하던 독서 형태를 묵독으로 바꿨다고 분석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필사본 소설을 대여해주고 돈을 벌었던 조선후기의 책 대여점 ‘세책방’이 배경으로 나온 영화 <음란서생>의 한 장면. 조선후기에 서울이 도시화되면서 책이 상품으로 인식되는 등 독서문화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윤정안 서울시립대 강사는 이런 변화가 기존의 낭독하던 독서 형태를 묵독으로 바꿨다고 분석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조선후기 한양의 도시화 따라
한글소설 ‘묵독’으로 대량소비
대량출판 가능 방각본 출현도
“근대의 뿌리 ‘개인’ 탄생시기”
윤정안 ‘…독서형태 변화’ 논문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조선시대 양반의 모습 가운데 하나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큰 소리로 책을 읽는 모습이다. 이처럼 소리 내어 글을 읽는 행위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보편적인 글 읽기의 형태였다고 한다. 아르헨티나 작가인 알베르토 망겔이 쓴 <독서의 역사>는 알렉산더 대왕이 모친에게서 온 편지를 말없이 읽자 부하들이 크게 당황했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독서는 원래 묵독이 아닌 낭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원래 구술행위였던 것이 문자 문화의 발달에 따라 묵독으로 바뀌어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선 언제부터, 어떤 과정을 거친 뒤에야 책을 소리내어 읽지 않게 됐을까?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가 22일 여는 정례발표회에서 윤정안 서울시립대 국어국문학과 강사는 ‘조선후기 서울의 도시화와 독서 형태의 변화’라는 논문을 통해 서울의 도시화가 낭독에서 묵독으로 독서 형태를 변화시켰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도시의 발달이 전통적 독서 방식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난 조선후기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서울이 상업적으로 크게 발전했고, 이에 따라 양반 못지않게 지식을 쌓고 학문을 연구하는 신흥 계층이 대두됐다. 그러다 보니 도서의 생산과 유통이 매우 제한됐던 조선전기와 달리, 도서가 하나의 상품으로 인식되면서 영리를 목적으로 책을 다루는 현상이 나타났다.

사대부가를 방문해 책을 팔던 책쾌, 책을 빌려주고 돈을 받는 세책점, 기존 필사본을 대체해 대량생산이 가능한 방각본의 등장 등은 18세기 들어 나타난 문화현상이다. 또 이런 도서 유통망에 가장 적합한 상품으로서 한글소설이 급격히 성장했다.

시대적 상황에 따른 이런 독서문화의 변화는 기존에도 많이 연구된 바 있다. 그러나 윤 강사는 한발 더 나아가, 이런 변화가 기존의 낭독을 묵독으로 바꾼 지점을 포착했다. 18세기 즈음만 해도 주된 책 읽기 방식은 낭독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기록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전기수’(이야기꾼), ‘낭독자’의 존재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면 한글소설을 묵독으로 읽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당시 문인인 유만주는 일기인 <흠영>에서 “한글소설을 잘 읽는 사람은 10여행을 일시에 소리 내어 읽지는 못하더라도, 눈으로 보고 이해하며 읽어 내려간다고 한다”고 적기도 했다.


이에 대해 윤 강사는 “묵독은 낭독에 견줘 읽는 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더 많은 책을 요구한다”며 “이는 대량출판인 방각본의 출현과도 연관된다”고 풀이했다. 방각본은 필사본보다 더 많은 자본이 투입되기 때문에 충분한 소비자가 확보되어야 생산과 유통이 가능한데, 도시의 발달로 인구가 크게 늘고 한 사람의 독서량도 늘어서 그런 수요를 뒷받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낭독에서 묵독으로의 변화는 다른 요인들에도 영향을 줬다고 한다. 예컨대 필사본에 견줘 방각본의 면수가 적은 이유를 기존에는 생산비 절감에서 찾았는데, 묵독이 확대되며 빠른 속도로 읽어나갈 수 있도록 구술문화 속에 남아 있던 관용구나 장황한 묘사를 제거하는 경향도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윤 강사는 “묵독의 탄생은 본격적인 ‘개인적 독서’의 탄생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봤다. 보통 지금의 독서문화가 식민지 시기를 거치며 수입된 ‘근대’의 결과물이라고만 생각하기 쉬운데, 조선후기의 독서문화 변화에서 근대의 뿌리라고 여겨지는 ‘개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문제 제기다.

한편 22일 정기발표에서는 △1950~1960년대 서울 명동의 양장점과 미장원을 통해 살펴본 여성의 소비문화(김미선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 △조선초기 한양의 천도 문제가 가진 정치사적 의미(김윤주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강사) △조선시대에는 개발되지 않았던 동숭동·연건동이 일제 강점기 들어 학원가를 이뤘던 과정(주상훈 서울대 건축학과 박사후연구원) 등 기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서울의 다양한 모습을 조명하는 연구들이 발표될 예정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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