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 블록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 교수가 26일 오후 서울 회기동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지구적 근대성, 그 위기의 기원’ 강연을 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프레드 블록 교수 ‘지구적 근대성, 그 위기의 기원’ 강연
“케인스 경제·유럽 복지모델 잊고
시장 근본주의 강조하다 위기”
칼 폴라니·대니얼 벨 이론 결합
사회과학 ‘새 생각’ 개발 강조
“케인스 경제·유럽 복지모델 잊고
시장 근본주의 강조하다 위기”
칼 폴라니·대니얼 벨 이론 결합
사회과학 ‘새 생각’ 개발 강조
위기는 새로운 생각을 필요로 한다. 2008년 터진 미국발 금융위기는 1940년대에 쓴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길 펴냄)을 다시 불러냈다. 자본주의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담고 있으면서도 마르크스주의와도 달라서 오랫동안 본격적인 주목을 받지 못했던 폴라니의 사상이 위기를 맞아 가치를 확연히 드러낸 것이다. 폴라니에게 영향을 받은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프레드 블록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거대한 전환> 영문판 해제에서 “냉전기간 자본주의 옹호자와 소련식 사회주의 옹호자들 사이 지극히 양극화된 논쟁에서 폴라니의 복잡하고도 섬세한 논리가 설 자리가 없었다”고 분석한 바 있다.
프레드 블록은 최근 경희대 미래문명원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아, 26일 석학 특별강연 프로그램인 ‘미원렉처’에서 ‘지구적 근대성, 그 위기의 기원’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블록은 칼 폴라니의 사회·경제 이론과 대니얼 벨의 ‘후기산업사회론’을 결합해 자신만의 고유한 정치경제적 시각을 편 학자로 이름을 얻었으며, 주로 시장 근본주의를 비판하는 데 앞장 서 왔다. 그러나 이번 강연에서는 정치경제적 이슈가 아닌, 닥쳐온 전지구적 위기 속에서 왜 사회과학은 새로운 생각을 개발하는 데 실패했는가를 분석하는 데 주력했다.
블록은 전지구적 근대의 흐름을 ‘양자택일’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재구성했다.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워낙 확고한 양자택일의 틀이 새로운 생각의 출현을 막아왔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다.
먼저 그가 선례로 참조하는 것은, 어쩌면 지금과 비슷했던 1930년대의 세계경제 위기와 그로부터의 탈출을 도왔던 사회과학의 새로운 생각들이다. 1920년대에 거대한 생산력의 발전을 이뤘던 미국 경제는 1929년에 이르러 위기에 봉착했다. 주식시장은 붕괴됐고, 과잉 생산력에도 수요는 나타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됐다.
당시엔 사유재산 시스템과 사회주의가 양자택일로 존재했는데, ‘혼합경제’를 바탕으로 한 케인스 경제학과 스웨덴 사회민주당이 창안한 복지국가 모델은 이런 양자택일 체제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였다고 한다. 스웨덴 모델은 2차 세계대전 뒤 서유럽으로 전파돼 그 뒤 이어지는 번영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뒤 ‘자본주의’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끌어안은 미국 보수 우익 지식인들의 전략에 따라, 모든 것을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법칙으로 설명하려 드는 분위기가 팽배하게 됐다. 이에 따라 30년대의 경험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다시 양자택일 구도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블록은 “이전의 ‘사유재산 대 사회주의’를 대체한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양자택일 구도는 경제가 자기만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율적 제국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강화했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듯 양자택일 구도에 따른 생각이 1930년대에 ‘정부의 기능’에 기대었던 위기 탈출의 해법을 무력화시켰다고 본다. 시장의 자율을 지나치게 강조함에 따라 시장과 민주주의 정부 사이에는 구조적인 분쟁이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이는 자본주의와 모순되는 큰 정부에 대한 비상식적인 두려움으로 연결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2008년 찾아온 위기의 배경이기도 하다.
블록은 “전지구적 수요를 늘리고 지속가능한 경제 성장의 시대를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있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건강, 교육, 청정에너지 등을 제공할 수 있는 지방정부와 비영리 기구, 중소 기업, 직원 협동조합 등등에 건전한 대출을 해주는 것을 사례로 들며, “사실 이것은 그동안 세계은행이 해왔던 일”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이런 새로운 생각, 정책에 대한 집단적 상상력들이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양자택일의 벽에 막혀 현실로 옮겨지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강연에 이어 진행된 라운드테이블에서 도정일 경희대 교수는 “능력 상실의 시대에서 위기의 뿌리가 무엇인지 탁월하게 제시해줬다”고 평가했다.
장경섭 서울대 교수 등 다른 패널들은 “미국적 경험에만 의존한 것 같다”, “양분법 문제는 세계 여러 나라의 특수성을 함께 고려하면서 극복해나가야 할 것” 등의 의견을 내놨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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