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 서강대 중국문화학 교수
탐욕 부추기는 자본주의가
‘예’라는 상징체계 해체시켜
보편가치 묶을 새 대안 필요
‘예’라는 상징체계 해체시켜
보편가치 묶을 새 대안 필요
‘예란 무엇인가’ 펴낸 김근 교수
예전엔 누군가 돈 좀 벌었다고 으스대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고 주위의 공분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엔 그런 일로 공분을 구하면 ‘루저’(패배자)로 찍힌다. ‘예’(禮)는 낡고 고리타분한 가치가 됐고, 그 자리를 돈의 가치가 차고앉았기 때문이다. 대신 나이와 서열을 무조건적으로 앞세우는 ‘장유유서’(長幼有序) 관념이 사회 곳곳에 조금씩 남아 예를 자처한다. 과연 우리 시대에 예는 억압과 굴종의 가치일 뿐인가?
김근 서강대 중국문화학 교수가 최근 펴낸 <예란 무엇인가>(서강대 출판부 펴냄)는 새로운 방식으로 예의 본질을 따져본 책이다. ‘옛 동양 고전들만 잔뜩 인용되지 않았을까’ 하는 예상을 깨고, 책 속에선 라캉과 지젝, 바디우, 이글턴 등 정신분석학과 문화비평 영역을 넘나들기 위해 필요한 이름들이 자주 등장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창’이라는 부제도 색다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에스엔에스 시대를 이해하고 진화시키는 핵심 개념이 바로 수천년 묵은 ‘예’ 사상이란 것이다.
15일 서강대 연구실에서 만난 김 교수는 “동양 전통 세계에서 예는 본래 사람이 세상이라는 ‘실재계’에 잘 접속할 수 있도록 돕는 ‘상징계’”라며 “상징계가 제구실을 못하게 되니, 에스엔에스가 실재계를 곧바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 지금의 사회현상”이라고 말했다. 어렵다 싶은 이 말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를 비유로 끌어들였다. 동료 코미디언이 사회자의 ‘불편한 진실’을 폭로하려고 하는 순간, 사회자는 동료의 휴대 마이크를 강제로 빼앗는다. 그러나 동료는 굴하지 않고 육성으로 관객들 앞에서 사회자의 불편한 진실을 까발린다. “마이크는 상징계에, 육성은 실재계에 속하죠. 예전엔 마이크 없이는 육성을 들을 수 없었는데, 이젠 에스엔에스가 별다른 상징계 없이 육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상징계 없이 실재계가 그대로 드러나는 현상은 과연 바람직한가? 김 교수의 본격적인 고민은 여기서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예라는 기존의 틀을 철저하게 다시 따지고 들어가서 그 답을 찾으려 했다. 경제적인 문제는 경제적인 방법으로는 풀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한 공자는 ‘욕망의 충족을 지양한 절제’에서 해결책을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예라는 상징체계였다고 한다. 서양의 사실주의에 기초한 ‘매너’와 달리 동아시아 전통의 예는 극기(克己), 곧 자기 억제를 통해 “세상에 적응하고 깃드는 방도”였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가 단순히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해야만 하는 형식이라는 점이다. <논어>의 첫 구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는 이를 잘 보여준다고 한다. 여기서 습(習)은 고통을 수반한 경험적 실천을 반복하는 것을 가리킨다. 지젝은 금지당하는 데에서 오히려 행복을 느낀다는 ‘조건부 행복’이란 개념을 말했는데, 이처럼 옛 사람들은 어떤 형식을 반복해서 수행하는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서 오히려 즐거움을 느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예는 사회 조직 전체가 지향하는 보편성을 구현하면서도, 개별 주체들에게는 스스로 느끼는 즐거움을 통해 존재로서의 특이성을 인식하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모님에게 예를 갖추는 과정을 통해 자식으로서 자기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논의를 통해 김 교수가 강조하는 것은 “상징을 버리고서 실재를 해결할 방법은 없다”는 주장이다. 탐욕을 부추겨야 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속성은 그 동안 개인들이 탐욕을 억제하게끔 작동했던 예라는 상징체계를 해체해버렸고, ‘법치’라는 상징체계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그러나 지금의 법치는 99%가 아닌 1%에게만 유효할 뿐이다. 결국 “상징계에서 배제된 것은 실재로서 귀환한다”는 라캉의 말처럼 99%의 목소리는 법이나 의회와 같은 상징계에서 벗어나 월가나 촛불집회와 같은 실재계에서 터져나왔다. 실재계에서 이들의 목소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에스엔에스라고 한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스스로도 대안이 무엇인지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실재계에서 중구난방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보편적인 가치로 묶어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상징계의 발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상징계인 예가 무엇인지 제대로 따져봐야 한다는 것. 물론 ‘예를 복원하자’는 말은 이미 시대착오적인 주장이 됐지만, 과거의 틀로부터 출발해 시행착오를 겪어나가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글·사진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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