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바쿠닌> 에드워드 카 지음, 이태규 옮김/이매진·3만원
미하일 바쿠닌
마르크스와 경쟁자였던 바쿠닌
인간의 능동적 자발성 중시한
‘절대적 개인주의’ 사상 재조명 온 유럽이 혁명으로 들썩이던 19세기 후반, 걸출한 혁명이론을 내놓았던 카를 마르크스의 가장 도드라진 경쟁자는 러시아 태생의 아니키즘 혁명가 미하일 바쿠닌(사진·1814~1876)이었다. 그는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과 더불어 ‘아나키즘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큰 발자취를 남겼다.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을 두고 벌어진 마르크스와 바쿠닌의 대립은 20세기 세계 전역에서 펼쳐졌던 볼셰비즘과 아나키즘 사이 치열한 대립의 원조이기도 했다. 그러나 바쿠닌은 치밀한 이론가였던 마르크스와는 달리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하는 작업을 하지 않아, 그 진정한 실체를 꿰뚫어보긴 쉽지 않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지은이이자 20세기 가장 유명한 역사가 가운데 한 명인 에드워드 핼릿 카의 <미하일 바쿠닌>은 촘촘한 사료 분석으로 바쿠닌의 실제 모습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평전이다. 1937년 쓰인 이 책은 1989년에 국내에 소개된 바 있지만 축약·번역본이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모두 한계에 부딪힌 지금, ‘오래된 미래’로서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는 시점에 나온 첫 완역본이어서 눈길을 끈다. 지은이는 바쿠닌의 삶이 모순으로 가득했다고 평가한다. 러시아 귀족 출신으로 독일 낭만주의와 헤겔 철학에 이끌렸던 바쿠닌은 1840년 유럽의 아나키즘에 경도된 뒤로 프랑스 2월혁명(1847), 프라하 봉기(1848), 드레스덴 봉기(1849), 폴란드 무장봉기(1863), 이탈리아 혁명운동(1864~1868) 등 온 유럽을 무대로 삼아 한평생 혁명을 찾아다녔다. 만년엔 마르크스와 4년 동안 대립하다 제1인터내셔널에서 제명됐으며, 지독한 가난 속에 살다 스위스 베른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토록 넘치는 열정과 의지에도 불구하고 바쿠닌은 이렇다 할 성과나 성취를 이룬 적은 없었다. 그가 관여한 여러 무장봉기는 모두 실패했다. 마르크스의 <자본> 번역 등 벌인 일들이 제대로 끝맺은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꿈꾸던 모든 것이 이뤄진다면, 나는 즉시 내가 만든 모든 것을 다시 무너뜨리기 시작할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바쿠닌은 일평생 권위를 무너뜨리려 달려들기만 했다고 이 책은 말한다. 인물 자체는 더욱 모순적이다. 굉장한 카리스마와 열정을 갖췄지만, 늘 누군가를 가르치려 드는 자세에다 거의 한평생 남에게 빚을 지고 살았다. 중앙집권과 제도적 권위를 부정하면서도 음모에 기반한 비밀결사 활동에 매진하기도 했다.
어떻게 이런 바쿠닌이 아나키즘의 아버지가 되어 스페인·이탈리아·러시아 혁명 등에 폭넓은 영향을 줄 수 있었을까? 지은이는 그의 핵심적 가치를 ‘절대적 개인주의’에서 찾는다. 그는 책 곳곳에서 마르크스와 바쿠닌을 비교하며, “개인주의는 바쿠닌의 사회적·정치적 체계의 진수이며 마르크스를 반대하는 바쿠닌 사상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정치가·행정가의 눈으로 대중을 바라본 데 반해, 바쿠닌은 선지자이자 공상가로서 대중이 아닌 개인, 제도가 아닌 도덕에 관심을 쏟았다는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농민에 관한 태도 차이다. 마르크스는 혁명을 수행할 능력에 대한 냉정한 평가에 기반을 두고 농민은 결코 계급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봤다. 그러나 바쿠닌은 러시아 농민의 삶 속에 ‘공유’를 신성시하는 삶의 태도가 배어 있다고 보고, 이를 근거로 삼아 혁명 세력으로서 농민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켰다.
지은이는 바쿠닌이 “역사상 (어떤 권위나 제도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의 정신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했다”고 평가한다. “바쿠닌은 ‘생명의 능동적 자발성’을 보여줬다”는 하승우 지행네트워크 연구활동가의 책머리 해설도 주목할 만하다. 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가 지적했듯, 바쿠닌은 “이론이나 과학과 같은 인위적인 틀에 기대지 않고도, 생명 자체의 원리로부터 모든 지배와 권위를 거부하는 정당성을 창조해냈다”는 것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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