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로 불리는 슬라보이 지제크(왼쪽)가 25일 오전 서울 한남동 한 호텔 정원에서 홍세화 진보신당 재창당준비위 상임대표와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 지제크는 “좌파는 깊은 위기에 빠져 있다”고 진단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서울 온 ‘위험한 철학자’ 지제크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와 대담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와 대담
그리스 위기 이후
시민의 좌파정당 지지 긍정적
서구도 더는 발전하기 어려워 전세계 좌파의 위기
시스템 내 개선 찾는게 한계
유토피아보단 실질적 변화를 다시 만난 한국
희망버스, 근본적 사회윤리
독특한 북한체제 관심 많아
현실정치와 대중문화를 오가는 급진적인 사유를 펼쳐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로 불리는 슬라보이 지제크가 한국을 찾았다. 2003년 한국철학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뒤로 9년 만이다. 이번에 지제크는 문화평론가인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문학)와 인문학 콘텐츠 사업체 ‘아트앤스터디’의 초청으로 24일 입국했다.
2000년대 이래 급진적인 태도로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해온 지제크는 요즘 세계 지성계의 ‘슈퍼스타’로 꼽히는 철학자다. 최근 몇해 동안 전세계가 미국발 금융위기, ‘점거하라’(오큐파이) 운동, 아랍의 민주화 운동 등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보여주는 다양한 징후적 사건들을 잇따라 겪으면서 그의 사상은 더욱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현실을 적절한 선에서 개혁해나가는 것을 거부하고, 문제의 근원까지 파고들어 새로운 이론과 전망을 만들어낼 필요성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지제크의 사유는 독창적이라고 인정받는다.
지제크는 한국에서의 첫 일정으로 홍세화 진보신당 재창당준비위 상임대표와 만나 대화를 나눴다. 공교롭게도 한국전쟁 발발 62돌을 맞은 25일 서울 한남동 한 호텔에서 홍 대표와 만난 지제크는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이 상황에서 ‘진보’ 또는 ‘좌파’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등을 이야기하는 한편으로, 한국의 분단 상황 등에 대해서도 2시간 동안 자신의 생각을 쏟아냈다.
먼저 홍 대표가 현재 유럽 재정위기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는 그리스 2차 총선 결과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리스 총선 결과를 볼 때, 유럽 일부 나라들의 재정 파탄에서 비롯된 세계 자본주의 체제 위기가 어떻게 흘러갈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지제크는 “유럽의 가장 발달된 국가들과도 긴밀하게 이어져 있는 그리스 사태는 서구 국가들일지라도 현재의 자본주의 위기에서는 더 발전하거나 복지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그리스 총선에서 긴축정책을 지지한 보수 신민당이 결국 승리한 것을 두고 민주주의의 후퇴가 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드러냈다. 그는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내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서로 결혼한 사이였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이제 이혼하려 한다는 점”이라며 “여태까지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밀어왔다지만, 이제 (신자유주의 이후) 자본주의의 새로운 모델은 더는 민주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스 등에서 볼 수 있듯 민주적으로 인준받지 않은 ‘테크노크라트’들이 모든 결정을 내리는 현 자본주의의 세계적 흐름과 그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지제크는 다만 이번 그리스 총선에서 ‘긴축 수용이냐 구제금융 재협상이냐’라는 단호한 선택지를 제시해 지지도를 끌어올린 급진좌파연합(시리자)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혼란스러운 그리스 정국에 질서를 가져왔고, 시리자가 승리했다면 아마도 새로운 시민성의 가능성이 열렸을 것”이라는 견해였다. 그는 “시리자는 ‘집권하면 스탈린주의가 도래할 것’이라는 수준 낮은 정치선동 때문에 집권하지 못했지만, ‘유로존 안에서의 생존’을 모색하며 기존 4%대 지지율을 25~28%대까지 끌어올린 것은 한국의 새로운 ‘좌파정당’ 재구축에도 참조할 만한 사례”라고 말했다.
홍 대표는 “한국에서는 87년 6월항쟁으로 군사독재를 종식시켰지만, 그 뒤 이어진 개혁적 자유주의 정권의 10년간 집권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 등을 통해 노동계급 내부의 분화와 자본의 강화로 귀결됐다”며, 세계적으로 좌파가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이에 지제크는 “좌파는 자본주의를 비판해왔지만 위기가 닥치자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지금 깊은 위기에 빠져 있다”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옛날 좌파는 ‘무엇이 벌어질지 알고 있으며,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모으기만 하면 된다’고 말해왔지만, 지금은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인데도 좌파가 그에 대해 ‘큰 질문’을 던지고 있지 않다는 비판이었다.
또 지제크는 “현재 좌파는 시스템 안에서 뭔가를 더 낫게 만드는 데 관심을 갖는 등 암묵적으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계”라고 지적했다. 그는 “좌파는 어떤 해답과도 같은 유토피아와 도그마를 내세우는 세력이 아니라 사람들을 ‘포섭과 배제’로 나누는 시스템(지제크는 이를 ‘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라고 부른다)을 문제로 삼는 관점을 가지고, 이런 현실 속에서 ‘사람들에게 무엇을 제시할 것인가’ 질문을 던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요한 것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런 ‘좌파의 재구축’을 위한 실질적인 과제는 무엇일까. 지제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같은 주장을 했는지보다,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무엇을 진짜 변화라고 느끼는가 등이 더 중요하다”며 “실용주의와 이상주의가 결합되어 있는 복잡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좌파의 과제”라고 조언했다.
대화는 국내 노동운동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들로 풀려갔다. 홍 대표는 지난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맞선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골리앗 크레인 농성과 이를 지지했던 ‘희망버스 운동’, 그리고 대량해고 사태의 여파로 노조원 22명이 세상을 떠났지만 희망버스만큼 시민사회로부터 강력한 연대를 얻지 못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실정을 알렸다. 이에 대해 지제크는 “기본적인 사회적 체계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할 때 이를 돕는 것은 철학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길거리에 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이 있으면 가서 도와야 하듯, 그들을 돕는 것은 ‘신자유주의’ 등에 대한 논의를 떠나 아주 근본적인 사회적 윤리에 속한다”고 잘라 말했다.
지제크는 남북 분단과 북한 체제에 대해서도 유난히 관심을 보였다. 그는 “관료가 지배하는 체제를 갖춘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과 달리 북한은 초자연적인 현상까지 동원해가며 가족 세습으로 나아갔다”며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 이토록 독특한 북한 체제를 만들었는지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지제크는 그동안 ‘고립’을 택했다는 북한이 실질적으로는 외부의 식량지원과 미국·일본과의 수교에 매달리는 등 훨씬 더 (외부)의존적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번 지제크의 방한은 그가 스스로 원하고 먼저 방한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지제크는 27, 28일 저녁 7시 경희대 평화의전당과 건국대 새천년관에서 각각 강연회를 열어 국내 대중들과 만나는 등 일주일 동안 한국에 머물다 30일 출국할 예정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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