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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지제크를 활용하자 거리낌없이

등록 2012-07-01 18:56

울림과 스밈
최근 국내에는 세계 지성계 석학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다. 지난 5월에는 <엔트로피>로 유명한 미국의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이, 지난달에는 <정의란 무엇인가>로 ‘정의’ 열풍을 일으켰던 마이클 샌델 미 하버드대 교수와 동유럽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가 잇따라 한국을 찾았다. 특히 지제크의 방한은 ‘철학계의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별명에 걸맞게 더욱 대중적인 관심을 끌어모았고 많은 이야깃거리도 남겼다.

만약 지제크의 방한에 대한 열광을 삐딱하게 보고 딴죽을 걸고 싶다면, 아마도 두 가지 자세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이른바 ‘세계적인 석학’을 맹목적으로 추종한다는 ‘문화 사대주의’를 꼬집는 자세다. 둘째는 지제크의 사유로는 현실을 실질적으로 바꿔낼 수 없으며, 그의 사유에 감춰진 요소들이 해롭기까지 하다고 비판하는 자세다. 사실 이런 비판은 서구 철학계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그에게 ‘엠티브이(MTV) 철학자’란 조롱 섞인 별명을 붙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 사는 사람들이 반자본주의적이고 급진적인 당신 이야기에 열광한다는 것은, 어쩌면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면서 커피값 일부를 떼어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돕는 것과 비슷한 것 아닌가?”

지난 27일 지제크의 경희대 강연 때 한 청중이 던진 질문은 이런 둘째 자세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허위적 방식에 대한 지제크의 사유를 그 자신에게 적용시켜보면, 결국 현실의 변화와 무관하게 ‘급진적 생각을 한다’는 위안을 얻는 데 불과하지 않으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지제크는 “나를 스타벅스 커피처럼 이용하며 위안을 얻더라도 괜찮다”며 “이데올로기를 지배계층의 전유물로 남겨둘 것이 아니라, 피지배계층이 적극 활용할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제국주의 팽창 시대에 가톨릭은 식민지 통치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쓰였지만, 나중엔 지배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종교 구실을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것이 바로 지배 이데올로기를 피지배층을 위한 것으로 끌어온 사례라는 것이다.

‘세계적 석학’들이 던지는 말 자체보다 그 수식어에만 더 관심을 쏟는 현상을 비판하는 것, 냉정하게 지제크의 사유를 뜯어보고 그 속에 담긴 한계를 찾아보는 것,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절실한 과제다. 그러나 어느 한쪽 자세에 과도하게 쏠려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수신하지 않는 것 또한 피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지제크의 이번 방한은 새 책 출간 같은 특별한 계기 없이, 오롯이 스스로 ‘한국에 가고 싶다’고 해서 이뤄졌다. 한국에 머무른 일주일 동안 그는 두 차례 대중강연뿐 아니라 홍세화 진보신당 재창당 준비위 상임대표와의 만남, 통일전망대와 임진각 방문, 설치영상작가 임민욱씨와의 인터뷰, 쌍용차 정리해고 희생자 분향소 방문 등 열정적인 일정을 소화했다.

‘진보의 위기’란 말조차 식상해지는 지금, 우리가 다시금 되새겨야 할 지제크의 메시지는 ‘냉소주의를 이겨내는 것’이다. 성에 차지 않는 것들을 ‘쓸모없다’고 하나씩 소거해나가다보면, 결국 그 어떤 것도 남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상을 바라는가? 그렇지 않다면 지제크가 말한 대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제크를 활용해야” 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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