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서울 종로 성균관대 연구실에서 최근 펴낸 11권짜리 <한국어의 근대와 이중어사전> 영인본을 보여주고 있는 황호덕 성균관대 교수(오른쪽)와 이상현 부산대 점필재연구소 인문한국(HK) 연구교수. 두 사람은 자료 수집을 위해 지난 5년 동안 국내외 도서관과 박물관, 교회, 고서점 상가 등을 헤집고 다녔다고 한다.
‘…이중어사전’ 펴낸 황호덕·이상현 교수
외국인 쓰던 사전 13종 모아 해제
“개념어·개념사 연구 기초 제공”
서구개념 한국어 변천 과정 또렷
“일방적 수입 아니라 협업이었다” ‘번역된 근대’, 곧 우리가 서구로부터 근대라는 틀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하나의 커다란 번역으로 보는 관점은 이제 그다지 낯설지 않다. 이 관점은 오늘날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생각이나 말이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정착됐는지 따져 묻길 요구한다. 국가나 민족, 사회와 같은 개념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퍼져 나갔는지 들여다보는 개념어·개념사 연구가 최근 각광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사전’ 없이 과연 번역이 가능할까? 우리나라 최초의 사전은 1938년 문세영이 편찬한 <조선어사전>이지만, 그 전에 사전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80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까지 외국인 선교사 등이 주도해 만든 사전들이 있었는데, 이를 ‘이중어사전’이라 부른다. 각각의 외국어에 들어맞는 우리말을 찾아서 정리했기 때문에 국어사전이 나오기 전까지 실질적으로 사전의 기능을 수행했으며, <조선어사전> 역시 이중어사전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만든 사전이라 하여 그동안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했고, 그 자료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국문학자인 황호덕 성균관대 교수와 이상현 부산대 점필재연구소 인문한국(HK) 연구교수가 최근 대표적인 이중어사전들을 정리한 <한국어의 근대와 이중어사전>(전 11권, 박문사)을 펴냈다. 5년 동안의 자료 추적으로 국내외 도서관과 교회, 장서가들의 손에 숨어 있던 13종의 이중어사전들을 끌어모아서 영인하고, 1000여장에 이르는 해제를 붙인 노작이다. 또 이중어사전에 대한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담은 연구서 <개념과 역사, 근대 한국의 이중어사전>(전 2권)도 함께 펴냈다.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번역된 또는 중역된 근대’의 과정을 정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작업은 그 의미가 크다.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연구실에서 만난 두 지은이는 “사전은 개념과 말을 정리하는, 사회적으로 인준을 받은 가장 최종적인 자료”라며 “요새 활발한 개념사·개념어 연구에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두 사람이 정리한 이중어사전들에는 호러스 언더우드, 제임스 게일 등 서구 선교사들이 주도해 만든 사전, 식민지배의 주체인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어사전> 등이 포함된다. 한국인 이종극·김동성이 펴낸 한영사전 등 희귀자료도 찾아내 정리했다. 일차적으로 이 자료들은 서구의 개념이 한국어로 어떻게 정리되어갔는지 변천과정을 보여준다. 예컨대 ‘프로그레스’(progress)란 영어 단어를 살펴보면, 초창기인 1890년대에는 ‘앞으로 가다, 나아가다’ 등으로 풀이되다가 1900년대로 넘어가면서 ‘진보, 전진’ 등 한자어로 풀이되고, 나중에는 순우리말과 한자어를 함께 종합해 번역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이런 변천 과정은 근대 한국어가 스스로 어떻게 모습을 가다듬었는지, 초창기 한국학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등 수많은 연구 주제를 새롭게 제기한다. 특히 이들은 이중어사전을 만드는 데 ‘통국가적(trans-national) 협업’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저 어느 외국인이 주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름 모를 수많은 조선인 지식인들의 노력이나 한자어를 중심으로 한 중국어·일본어와의 상호 참조 등 일국적 틀에 갇히지 않는 지적 활동이 이중어사전의 밑거름이 됐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조선어학자 주시경과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게일, 일본의 한국학자 다카하시 도루 등이 함께 모여 한국어에 대한 회의를 했던 기록도 있다”며 “한국이 서구의 개념이나 일본의 번역을 일방적으로 수입했다는 식의 관점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정리한 이중어사전 내용을 모두 공개할 생각이다. 현재 627개 항목을 데이터베이스에 올렸으며, 내년까지 전체 2만여개 항목(낱말당 20여개의 뜻풀이가 있는 것을 고려하면 전체 40여만개 낱말)을 모두 입력해 동료 학자들이 자유롭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 한다. 글·사진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 “3년 전엔 하루 5억 걷었는데, 지금은 1억도 안돼요”
■ 넥타이 잡힌 이상득 “어떻게 저런 사람들을 통제 못 하나”
■ “저는 엄마가 아니라 미친년이었어요”
■ 삼성, 애플과의 소송에서 이긴 이유가 ‘가관’
■ [화보] 검찰 소환 이상득, 계란 세례…
“개념어·개념사 연구 기초 제공”
서구개념 한국어 변천 과정 또렷
“일방적 수입 아니라 협업이었다” ‘번역된 근대’, 곧 우리가 서구로부터 근대라는 틀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하나의 커다란 번역으로 보는 관점은 이제 그다지 낯설지 않다. 이 관점은 오늘날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생각이나 말이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정착됐는지 따져 묻길 요구한다. 국가나 민족, 사회와 같은 개념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퍼져 나갔는지 들여다보는 개념어·개념사 연구가 최근 각광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사전’ 없이 과연 번역이 가능할까? 우리나라 최초의 사전은 1938년 문세영이 편찬한 <조선어사전>이지만, 그 전에 사전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80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까지 외국인 선교사 등이 주도해 만든 사전들이 있었는데, 이를 ‘이중어사전’이라 부른다. 각각의 외국어에 들어맞는 우리말을 찾아서 정리했기 때문에 국어사전이 나오기 전까지 실질적으로 사전의 기능을 수행했으며, <조선어사전> 역시 이중어사전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만든 사전이라 하여 그동안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했고, 그 자료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국문학자인 황호덕 성균관대 교수와 이상현 부산대 점필재연구소 인문한국(HK) 연구교수가 최근 대표적인 이중어사전들을 정리한 <한국어의 근대와 이중어사전>(전 11권, 박문사)을 펴냈다. 5년 동안의 자료 추적으로 국내외 도서관과 교회, 장서가들의 손에 숨어 있던 13종의 이중어사전들을 끌어모아서 영인하고, 1000여장에 이르는 해제를 붙인 노작이다. 또 이중어사전에 대한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담은 연구서 <개념과 역사, 근대 한국의 이중어사전>(전 2권)도 함께 펴냈다.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번역된 또는 중역된 근대’의 과정을 정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작업은 그 의미가 크다.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연구실에서 만난 두 지은이는 “사전은 개념과 말을 정리하는, 사회적으로 인준을 받은 가장 최종적인 자료”라며 “요새 활발한 개념사·개념어 연구에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두 사람이 정리한 이중어사전들에는 호러스 언더우드, 제임스 게일 등 서구 선교사들이 주도해 만든 사전, 식민지배의 주체인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어사전> 등이 포함된다. 한국인 이종극·김동성이 펴낸 한영사전 등 희귀자료도 찾아내 정리했다. 일차적으로 이 자료들은 서구의 개념이 한국어로 어떻게 정리되어갔는지 변천과정을 보여준다. 예컨대 ‘프로그레스’(progress)란 영어 단어를 살펴보면, 초창기인 1890년대에는 ‘앞으로 가다, 나아가다’ 등으로 풀이되다가 1900년대로 넘어가면서 ‘진보, 전진’ 등 한자어로 풀이되고, 나중에는 순우리말과 한자어를 함께 종합해 번역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이런 변천 과정은 근대 한국어가 스스로 어떻게 모습을 가다듬었는지, 초창기 한국학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등 수많은 연구 주제를 새롭게 제기한다. 특히 이들은 이중어사전을 만드는 데 ‘통국가적(trans-national) 협업’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저 어느 외국인이 주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름 모를 수많은 조선인 지식인들의 노력이나 한자어를 중심으로 한 중국어·일본어와의 상호 참조 등 일국적 틀에 갇히지 않는 지적 활동이 이중어사전의 밑거름이 됐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조선어학자 주시경과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게일, 일본의 한국학자 다카하시 도루 등이 함께 모여 한국어에 대한 회의를 했던 기록도 있다”며 “한국이 서구의 개념이나 일본의 번역을 일방적으로 수입했다는 식의 관점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정리한 이중어사전 내용을 모두 공개할 생각이다. 현재 627개 항목을 데이터베이스에 올렸으며, 내년까지 전체 2만여개 항목(낱말당 20여개의 뜻풀이가 있는 것을 고려하면 전체 40여만개 낱말)을 모두 입력해 동료 학자들이 자유롭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 한다. 글·사진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 “3년 전엔 하루 5억 걷었는데, 지금은 1억도 안돼요”
■ 넥타이 잡힌 이상득 “어떻게 저런 사람들을 통제 못 하나”
■ “저는 엄마가 아니라 미친년이었어요”
■ 삼성, 애플과의 소송에서 이긴 이유가 ‘가관’
■ [화보] 검찰 소환 이상득, 계란 세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