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어느 겨울날 서울 종로5가에 위치한 광장시장의 모습. 1905년 첫 ‘사설’ 상설시장으로 탄생한 광장시장은, 107년 동안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으로 서민들과 함께 해왔다. <광장시장 이야기>는 광장시장 107년 역사를 여러가지 에피소드로 구성한 책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광장시장 이야기>
<광장시장 이야기> 김종광 지음/샘터·1만4800원
이정재가 전쟁뒤 3층건물 짓고
포목점 들어선 60년대 전성기
IMF…쇼핑몰 밀려 쇠락했지만
1500개 점포에 1만5천명 삶터
동대문·경동시장은 ‘광장 분신’ 여러분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재래시장’이라고 하면 어디가 떠오르시나요? 많은 분들이 남대문시장을 떠올리던데, 사실 저로선 무척 섭섭합니다. 올해로 107살이나 된 저, ‘광장시장’을 잊고 계신 건 아닌가 해서요. 몇년 전 한 인기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인기 연예인인 강호동씨가 저를 찾아온 뒤로 “풍성한 먹거리와 넉넉한 인심이 있다”며 광장시장이란 이름이 새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긴 했죠. 물론 제 인기를 다시 확인하는 계기였지만, 혹시 그동안 저를 잊고 계셨나 하는 생각에 조금 섭섭하기도 했어요. 저 역시 우리나라 재래시장의 대표선수랍니다. 현직 대통령도 그렇고 대통령이 되시겠다는 분들이 저를 찾아와서 서민들과 만나고 출마선언도 하고 그러잖아요? 때마침 소설가 김종광(44)씨가 그동안 소설이나 에세이·논문·신문기사 등에 나온 여러 가지 자료와 자신의 취재 내용들을 묶어서 저의 107년 생애를 다룬 <광장시장 이야기>라는 책을 펴냈네요. 이 책에 담긴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읽다보면 저에 대해 좀더 잘 알 수 있을 테니, 제가 직접 한번 소개해볼까요? 제일 먼저 강조하고 싶은 건, 제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설’ 재래시장이라는 사실이에요. 상인들이 스스로 뜻을 모아서 설립하고, 나라로부터 허가를 받은 최초의 시장이에요. 1894년 갑오개혁 뒤로 누구나 자유로운 상행위를 할 수 있게 허용된 뒤로 그 전까지 대대로 장사를 해왔던 육의전과 시전 상인들은 장사의 근거를 잃게 됐죠. 그래서 고종 황제는 남대문에 있던 선혜청에 창내장을 개설했고, 이것이 남대문시장의 효시가 됐어요. 그런데 당시 일본 상인들이 우리나라 상권을 장악하겠다는 심보로 남대문시장에 전략적으로 많이 진출했어요. 대표적인 친일파인 송병준이 여기에 개입하고, 나중엔 남대문시장의 관리회사인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해 직접 운영하게 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죠. 이런 일본의 경제침략에 반발해서 만들어진 게 바로 저, 광장시장이에요. 고위관리였던 김종한과 돈 좀 있는 조선 상인들이 뭉쳐서 새로운 상권을 만들겠다고 나섰고, 1905년 7월 ‘광장주식회사’가 만들어졌답니다. 당시 종로 끄트머리에 객줏집들 중심으로 형성된 재래상권인 배오개시장이 그 터가 됐어요. 그 무대가 광교에서부터 장교까지였기에 ‘광장’(廣長)이란 이름이 붙었죠. 나중에는 ‘넓은 곳집’이란 뜻으로 ‘광장’(廣藏)으로 이름을 바꿨지만요. 일본 상인들이 남대문시장을 휩쓸고 일본 사람들이 만든 새로운 상권인 명동에서 이른바 ‘모던보이’들이 한껏 멋을 부리고 다니는 동안, 저는 묵묵히 조선에 있는 보통 사람들의 삶과 함께해왔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동대문시장, 경동시장도 다 저한테서 떨어져나간 분신들이에요. 그동안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제게 와서 머물렀습니다. 1950년대에는 전쟁의 폐허를 이겨내려 아등바등했던 사람들과 함께 ‘정치깡패’로서 저를 좌지우지했던 이정재가 떠오르네요.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됐던 저는 1959년 재건사업을 거쳐 지금의 모습인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로 다시 태어났어요. 이 사업을 주도했던 사람이 이정재였어요. 독재정권의 주먹 노릇을 했고 상인들 상대로 눈에 띄지 않았으나 엄청난 착취를 했다는 평가도 받지만, 어쨌든 지금의 저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인 건 사실이니까요. 60년대는 저의 전성시대였어요! 호경기였던 데다가, 대체로 식품류만 취급했던 상인들이 포목류 장사를 시작하면서 저는 더더욱 발전했답니다. ‘광장상가에서 60~70년대를 보낸 상인치고 성공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혼수 장사로 돈을 벌어 지방에 자기 소유의 공장까지 차렸던 책 속 가상인물인 만기씨가 대표적인 사례겠군요. 물론 누구나 부자가 된 것은 아니었고, 그 속에는 전태일 같은 사람도 있었죠. 태일이는 열두세살 때 광장시장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장사를 했던 적이 있어요. 그렇게 힘든 삶 속에서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읽고 쓰던 그는 나중엔 제 앞에 새로 들어선 평화시장에서 스물두살의 나이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자기 몸을 불살랐죠. 호황은 1980년대 중반까지였어요. 주변에 동대문종합시장 같은 대형시장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제 인기는 조금씩 떨어졌죠. 90년대 말 아이엠에프 금융위기는 ‘직격탄’이었습니다. 한 해 4조~5조원에 달하던 매출액이 2000년대 초반에는 4000억~5000억원 규모로 줄어들었을 정도니까요. 여기에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점, 심지어 소형 슈퍼마켓이 들어서면서 재래시장을 찾는 사람이 점차 줄어들게 됐죠. 그래도 저는 버젓이 살아 있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저와 함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광장시장에는 1500여개의 점포가 있고, 1만5000여명이 일하고 있다고 해요. 1959년 재건 때 만들어진 점포가 1300여개라고 하니, 어쩌면 무리한 통폐합이나 큰 변화 없이 상인들이 예전처럼 이어지고 있는 셈이죠. 반대로 요즘 들어 제가 오히려 주목받는 부분도 있답니다. 상인들이 취급하는 값싸고 독특한 구제 의류 등에 사람들이 큰 관심을 보이기도 해요. 연예인들이 입는 의상도 제게 찾아와 구한 것들이 많아요. 지은이는 저에 대해 쓴 이 책에 대해 “광장시장을 잘 아는 분들께는 추억을 되살리거나 자부심을 느끼거나 지난날을 되새김질하는 매개물이, 조금 알거나 잘 몰랐던 분들께는 새삼스레 알고 느끼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네요. 어쩜 제 생각과 이리 똑같은지요.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과 무척 가까운 곳에 있는 제 존재를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양한 물건을 가까운 곳에서 편리하게 장만할 수 있는 세상이라지만, 저는 다른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두 가지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역사’와 ‘사람 냄새’죠. 제 자서전 출간을 기념해서, 삶의 터전만이 간직할 수 있는 역사와 사람 냄새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꼭 말씀드리고 싶네요.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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