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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학자 넘치는 사회 ‘비판적 지성’에 재갈 물리다

등록 2012-08-14 20:06

지난 10일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본관 앞에서 류승완 박사가 대학 쪽의 ‘강의 박탈’을 비판하는 1인시위를 펼치고 있다. 지난해 초 2학기 강의를 배정받았다가 석연찮은 이유로 곧바로 취소당했다고 주장하는 류 박사는 지난해 8월11일부터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에서 1인시위를 벌여왔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지난 10일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본관 앞에서 류승완 박사가 대학 쪽의 ‘강의 박탈’을 비판하는 1인시위를 펼치고 있다. 지난해 초 2학기 강의를 배정받았다가 석연찮은 이유로 곧바로 취소당했다고 주장하는 류 박사는 지난해 8월11일부터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에서 1인시위를 벌여왔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일방적 강의 박탈에 ‘370일째 1인시위’ 류승완 박사
‘학교 비판’ 등 이유로 성대 강의 취소…생존·연구 박탈당해
“고용 불안한 학자들, 눈치 보며 대학과 자본 입맛에 맞춰”
폭염이 꺾이기 전인 지난 10일,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 본관 앞에 선 류승완(44) 박사의 얼굴에는 깊은 회한과 함께 굳은 결기가 묻어났다. 이날은 그가 여기서 1인시위를 벌인 지 꼭 1년째 되는 날이었다. 성균관대에 23년이나 다니며 박사학위까지 받은 그는 지난해 2학기부터 모교에서 ‘동양사상입문’을 강의할 예정이었으나, 강의 배정 소식을 듣고 이틀 뒤 곧바로 배정 ‘취소’를 통보받았다. 이에 항의해 지난해 8월11일부터 1인시위에 나섰고, 어느새 1년이 지나버렸다.

“강의를 ‘박탈’당하니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류 박사에게도 여느 학자들처럼 머릿속에 그려둔 진로가 있었다. 중국철학 전공자이자 한·중 근현대 사상 비교연구자로서, 2009~10년 중국 베이징대학에서 박사후 연수과정에 참여했다. 돌아와 일단 모교 강의를 맡고, 3년짜리 연구재단 프로젝트를 받아 연구교수 자리를 노려볼 생각이었다. 이런 그에게 ‘강의 박탈’은 ‘연구 박탈’이자 ‘생존 박탈’이나 다름없었다.

“강의로 한 달에 40만원가량, 연구교수가 되면 한 달에 200만원가량의 수입을 기대할 수 있었을 텐데, 생계 수단이 끊긴 거죠. 또 소속 대학이 없으면 도서관 자료 접근이 안 돼요. 연구 프로젝트에도 응모할 수 없으니 연구도 불가능합니다.”

대학 쪽이 ‘강의 박탈’ 이유조차 명확히 밝히지 않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 보통 강사의 강의 배정은 학과 권한인데, 자신의 경우엔 학과장이던 지도교수가 강의 배정을 확인해줬는데도, 대학 본부가 뒤집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처음엔 이유도 제대로 밝히지 않다가 나중에야 ‘등록금 투쟁으로 점거 농성했던 학생들을 배후조종했다’ ‘강사노조 활동 가능성이 있다’ 등의 얼토당토 않은 이유를 대더라고요.”

류 박사가 짐작하는 ‘강의 박탈’의 이유는 따로 있다. 2010년 12월께 충남대 학술지 <유교연구>에 당시 성균관대 총장이 주도한 국제학술대회의 발표 내용 가운데 일부 논리가 황도유학(일본의 식민 지배에 논리적 정당성을 준 친일 유학)과 비슷하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기 때문이 아니겠냐는 것. 성대 재단을 장악한 삼성그룹의 대학 운영에 대해서도 학내에서 비판을 종종 제기해 밉보였을 거라는 추측도 했다. 그는 “비판적인 학문과 목소리에 재갈을 물린 것이 ‘강의 박탈’의 본질”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학교 쪽은 “류 박사의 경우 이전에 했던 강의의 평가 점수가 낮아 학과 내 강사선정위원회에서 강의를 배정하지 않은 것”이라며 “비판 제기에 따른 강의 배정 취소라거나 대학 본부가 이 과정에 간여했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류 박사는 시간강사들의 잇단 죽음을 계기로 만들어진 ‘고등교육법 개정안’(일명 ‘강사법’)이 거꾸로 가는 현실과 이를 악용하는 대학의 실상에 분노를 터뜨렸다. 등록금과 정부 지원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는 대학들이 강사들의 고용 보장은커녕 겸임·초빙·연구교수 등 다양한 형태의 단기계약 교수직을 늘려 교수 사회 전체를 비정규직화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비정규직이 된 학자들은 위계질서에 따라 눈치 보며 대학과 자본의 입맛에 맞는 학문을 하기 쉽다”는 것이다.

앞으로 강사법이 개선된다고 해도 강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강의 배정을 박탈당한 그에게는 소급적용이 안 된다. 그런데도 그가 강사 지위 회복을 요구할 뿐 아니라 “모든 강사를 교원으로 인정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 땅에서 학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근본적인 존재 조건이 그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2일 여성 독립운동가 이병희씨가 94살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저항 시인 이육사와 비운의 천재 철학자 박치우 사이에 국외 독립운동 네트워크가 있었는지를 밝히는 자신의 연구에 이병희씨의 증언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씨를 만나 꼭 인터뷰를 해야겠다 생각했는데, 1인시위 등으로 1년이 흘러버리는 동안 핵심 증언자가 세상을 뜬 것이다.

류 박사는 박헌영·신남철·박치우·김태준 등 ‘패배한 자들’의 사상을 탐구한 자신의 책 <이념형 사회주의>(선인 펴냄·2010)의 머리말에 “정신적으로 거세된 채 지식의 만찬을 준비하는 ‘순수한 학자’들에게 역사의 패배자들이란 끔찍이도 두려운 존재인가 보다”라고 썼다. “힘과 돈이라는 물신의 무릎에 기대어 졸고 있는 ‘순수한 학자’들” 앞에서 역사의 패배자처럼 기약 없는 1인시위를 이어가는 자신의 오늘을 이미 예감이라도 했던 것일까.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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