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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양육, ‘돌봄 노동’은 수행 내면의 군더더기 떨어져나가”

등록 2005-08-04 16:01수정 2005-08-04 16:13

여성학자 오한숙희씨 “양육, ‘돌봄 노동’은 수행 내면의 군더덛기 떨어져나가”
여성학자 오한숙희씨 “양육, ‘돌봄 노동’은 수행 내면의 군더덛기 떨어져나가”
18살 사춘기 큰딸 · 중증 발달장애 15살 둘째딸 지난해 8월부터 직접 챙기는 ‘전업엄마’ 생활 처음엔 양육에 올인한 줄 알았는데 내 삶에 올인 온화 · 관대 · 원칙지키기 ‘양육의3ㄴ 법칙’ 발견 “육아 책임 회피하는 사회야, 미안한 줄 알아라”

최보은의 인터뷰 무제한/ 여성학자 오한숙희씨

꼬박 열다섯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왜 그랬을까.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 여성학자이자 방송인이고 저술가인 오한숙희(46)씨를 지금 왜 만나느냐, 그 이유만 설명하면 되는 일인 것을.

모녀 3대의 생계를 책임지는 ‘소녀가장’인 그는, 지난해 8월부터 경제활동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질풍노도의 사춘기에 접어든 18살 큰딸과 15살 중증 발달장애아 둘째딸을 직접 챙기는 ‘전업 엄마’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만 1년이 지났다.

 그래서 만났으면, 그동안 어땠나를 묻고 구구절절 어록일 그의 답을 그대로 옮기면 족하지 않은가? 문제는 인터뷰의 마침표를 찍는 기분으로 그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상담실’을 클릭한 데 있었다. 그곳에 올라온 수백건의 사연을 읽는데, 마음이 얼고 손끝이 얼었다. (왜 그런지는 읽어보시면 안다.) 오씨의 한 마디 한 마디가, 21세기에 이조여인의 삶을 살고 있는 이 여성들에게는 지푸라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생중계됐어야 마땅할 세시간짜리 어록 중에서 한 단어도 건너뛰거나 빼먹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누가 내 모성을 의심하지 않을까, 자기검열하지 마세요. 열달 품고 있다가 몸 찢어지는 통증과 함께 아이가 나와요. 몸이 기억하는 아이와의 유대는 여자가 의도적으로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아요.”

아이 밥도 안주고 나왔어, 나 계모 같지 않니? 라고 죄스러워 하는 여성들에게, 그는 모성이 없으면 자책도 없는 법이라고 안심시킨다. 칭얼대는 아이에게 “엄마 원고 써야 돼! 얼른 자!” 소리쳐놓고선 울다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며 “어차피 잘 아이를, 그놈의 원고가 뭐라고….” 가슴 아파하는 그게 바로 모성이라고.

 그러나 세상이 모성애 결핍의 혐의를 씌울 때, 여자들에게는 알리바이가 없다. 아이가 사회에서 파죽지세 승승장구하는 것밖에는. 그러니 여자들은 ‘애낳은 죄인’이 되고, 애낳은 죄인 만드는 세상에서 여자들이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가 ‘출산파업’인 것이다.


 그로 말하자면, 죄인 중에서도 중죄인 취급을 받았다. 이혼 직후 둘째의 발달장애 증세를 발견하고 전문가들을 찾아간 그는, 가는 곳마다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 태교는? 임신 중에 잘못 먹은 것은? 어머니가 장애아동을 잘 키우도록 도움을 주고 격려하고, 힘든 것 알지만 이것만 더하면 좋겠다, 이런 식이 아니라 당신한테 문제가 있는데 그걸 모르는 것 같다는 투였다. 페미니스트라서, 이혼해서, 이기적으로 자기 일만 해서, 아이가 그렇게 됐다는 쑤군거림도 들었다. 아이가 소위 정상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해서 어떡하나 하는 걱정보다는 그들로부터 부당한 수모와 공격을 받았다는 분노 때문에 더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둘째 발달장애가 이기적 엄마 탓?

 그렇다면 전업 엄마를 결심한 것은 뒤늦게 그들의 의혹어린 시선 앞에 굴복한 결과인가? 아니 아니. “내가 그렇게 했으니까 당신들도 그렇게 하라고 절대로 말할 수 없어요. 제 경우, 구조가 받쳐주지 못해서 그냥 혼자 저질러버린 거니까요. 게다가 난 굉장히 특수하고 운이 좋은 경우예요.”

집에서 일을 할 수 있는 프리랜서인 것도 다행이었지만, 그의 주변에는 ‘자원봉사자’가 많다. 그가 채워주지 못하거나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부분들을 주변의 여성들이 나눠 맡아준다. 운전 못하는 그를 대신해서 아이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일이라든지, 그가 신경 못쓰는 큰 아이의 독서지도를 도와준다든지.

 “정말 민폐 많이 끼치고 살았어요. 대신 그이들에게 뭔가가 필요할 때 제가 줄 수 있는 것을 주려고 애를 써요. ‘서로 민폐 끼치기’이고 일종의 품앗이죠. 양육은 인간의 힘으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예요. 묵묵히 참지 말고 아이 키우기가 얼마나 힘든지 소리높여 외치고 민폐 끼치고 그 소리들을 결합해내야 해요. 그러려면 사회가 나서야 되고 국가가 나서야 되는데, 그것은 넓게 보면 서로 민폐 끼치는 걸 당당하게 만드는 거고 거대한 품앗이 구조의 형성인 거죠.“

모성신화에 투항하는 대신, 지난 1년의 경험을 통해서, 그는 이제야말로 철저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육아의 산업적 가치와 사회적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저출산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더 이상 여성들만 알고 말아서는 안된다. “집에 가서 애나 보슈” 라는 말이 남성에 대한 엄청난 모욕일 만큼 육아를 가볍게 여기는 현실에서, 엄마 혼자의 힘으로 질높은 양육을 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사회가 알아들을 때까지 합창해야 되겠다고.

큰 아이가 초등학교 때 “나중에 엄마도 할머니처럼 내 아이 봐줄 거야?”하고 물었단다. “엄마는, 직접 봐주는 것보다 네가 걱정 안하고 아이 낳을 수 있도록 세상 바꾸러 다니는거야. 네 아이만 보는 게 아니라 네 친구들 아이도 다 볼 수 있게 되도록”이라고 답했다.

다행인 것은, “처음엔 양육에 올인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내 삶에 올인한 거였더라”는 깨달음을 덤으로 얻은 것이다. “처음에는 아이의 장애라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회피하고 싶고 두려웠어요. 그런데 전면적으로 뛰어들어 키우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도구적이고 지능적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아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소리지르고 울고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분명히 이 아이에게도 뭔가 자기생각과 느낌이 있을 거다, 얘의 영혼으로 통하는 문이 있을 거다. 중요한 건 내가 그걸 발견하는거지 아이를 남들 보기 정상적인 애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거예요.”

지금은 오히려 이 아이를 통해서 진정으로 인간이 사는 게 뭔가 배울 수 있는거구나, 놀란다. “1년 만에 생활면에서나 정서적으로나 사고방식으로나 굉장히 변했어요.” 1인기업 프리랜서 가장이다보니, 전에는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에도 ‘원고 써야 하는데, 강의 자료 준비도 해야 하는데, 세상 돌아가는 정보도 알아야 하는데….’ 한꺼번에 여러 가지 생각 하느라고 머리 속이 늘 복잡했다. 지금은 꼭 해야 될,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들만 생각한다.

 “살림도 3분의 1 넘게 남들 주었어요. 가볍게 살려구요. 둘째가 그렇게 살거든요. 꼭 필요한 몇 가지 외에는 욕심을 내는 법이 없어요.” 사람들은 아이가 상징과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 것을 축적하거나 정리하지 않는다고 얘기하는데 병리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그렇지만, 달리보면 ‘정상인들의 삶의 방식’을 돌아보고 성찰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대체 무엇이 정상인가, 물어보게 만드는 것.

1인기업 프리랜서 가장

 그 자신은 어릴 때부터 아주 샘이 많은 아이였다, 선생님이 “누구, 글씨 잘 썼네” 칭찬하면 꼭 그 아이 공책을 빌려다가 필체를 흉내내려고 애쓴다든지. 가난한 실향민 부부의 1남3녀중 막내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형제들과 부모님의 사랑을 두고 경쟁하고, 우리는 왜 가난한가,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자가 되는 길은 공부 잘하는 방법밖에는 없겠다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경쟁체제로 뛰어들고 자신을 도구화시키는 요소들이 내 안에도 되게 많았던 거죠.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아이가 내 발목을 잡아 나를 구원한 거예요. 자식이란, 자신이 은폐하고 있는, 깨닫지 못하고 있는 무의식의 발현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를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해서 펼친 <자폐아동의 심리치료>라는 책을 세 번째 읽으면서 스스로를 심리치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은 양육, 즉 ‘돌봄 노동’을 왜 수행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자신 속의 군더더기 찌꺼기들이 상당히 떨어져나가는 걸 느낀다.

또, 정상아인 큰 딸은 키우기 쉽고 장애아인 둘째는 키우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았다. “큰 애는 엄청난 정신노동을 요구하고 작은 애는 엄청난 육체노동을 요구한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양육의 방식이나 어려움은 본질적으로 같아요.” 어릴 때부터 끈끈하게 소통해왔던 사춘기 큰 딸의 갑작스러운 반항은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아이와 갈등하고 부대끼고 화해하면서, 양육의 ‘세가지 니은(ㄴ) 법칙’도 발견했다. 온화할 것, 관대할 것, 그러면서도 원칙을 지킬 것. “화내고 야단치면 당장은 속이 후련하겠지만, 시간 지나면 그 후유증을 해결하느라 더 힘들어져요. 그리고 관대함이란 기다려주기죠. 어떤 나라에선 아이에게 질문을 하고 17초를 기다려준다더군요. 급하다고 마구 몰아붙이고 채근하면, 입이 얼어붙거든요.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꼭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는 걸 알려주어야 해요.”

최보은/전문 인터뷰어
최보은/전문 인터뷰어
인스턴트 식품과 청량음료를 좋아하는 둘째는 그가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던 지난 연말 두달 동안 체중이 10kg 불었다. 라면 먹는 걸 허락해 달라는 뜻으로 울부짖는 아이에게 입술을 쥐어뜯기면서도 끝까지 “안 된다”고 했다. 아이의 체중은 일곱달만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어떤 중노동을 의미하는지 아는 데는, 딱 30분, 둘째와 그의 ‘대화장면’을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집어던지고 울부짖는 아이에게 끈질기게 “미안합니다”를 가르치는 그의 옆에서,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배워야 할 당사자는 따로 있지 않을까 문득 생각했다.(육아책임 피하는 사회, 딴청 피우지 말고 자수하시져.) 그리고 양육의 의무를 독과점한 나머지, 우리 여자들만 자꾸 철들어가는 것이 미안해졌다. 아이 키우기 함께 하면, 군대의 10분의 1도 안되는 기간내에 사람되고도 남는 경험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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