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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원이었지만 유신 분개한 농민의 일기엔…“대리투표…민주주의는 어디에”

등록 2012-09-19 20:39수정 2012-09-20 13:48

1970년대 유신정권이 대대적으로 펼쳤던 새마을운동 사업의 모습.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갈무리
1970년대 유신정권이 대대적으로 펼쳤던 새마을운동 사업의 모습.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갈무리
“찬표 던지고 홍보했지만
공명선거 말살…불쾌했다”
김영미 교수 ‘농민일기’ 통해
유신의 농촌지배방식 조명
“투표라야 하나 마나 결정적이다. 선거관리위원회 종사원급 참관인 모두 절대 지지자이다. 기권 없이 하라는 바람에 한 사람이 몇 명씩 하는가 하면 무더기 누(락)표가 있으며 반대가 있을 수 없다. 나 역시 찬(성)표를 했으나 공명 투표가 아닌 데서야 불쾌했다. 민주의 싹은 공명 투표에서야 이루어지는 것인데….”

1972년 11월21일 박정희 정권이 정권연장을 위해 유신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쳤던 날, 경기도 평택시 고잔리 대곡마을에 살던 농민 신권식(당시 43살)씨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찬성표를 던졌지만, 내심 강압적이고 공정하지 못한 투표장 분위기가 마뜩잖았던 것이다. 3년 뒤인 1975년 2월12일 박정희 대통령의 연임을 묻는 국민투표가 치러진 날 일기에 털어놓은 심경도 비슷했다.

“공명선거는 말살하고 대리투표가 전반(적)이며 현 정부의 홍보활동으로 개표는 하나 마나다. 참다운 민주주의는 어디 가고 부정투표의 현황이…대통령의…임기 연장이 불만이나 국론통일을 위하야 나도 찬(성)표를 던지고 홍보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씨는 그 시절 여당인 공화당 당원이었다. 선거 전 주민에게 선심용 술대접을 하는 등 ‘공화당 일꾼’으로 일했다. 낮에는 부정선거에 도움을 주고, 밤에는 일기에 비판을 늘어놓는 그의 태도를 어떻게 풀이해야 할까?

농민 신씨의 유신 체험 일기를 연구한 김영미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는 농촌 마을의 전통적 자치질서가 농민들이 박정희의 유신 독재에 침묵하거나 동의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지난 14~15일 민족문제연구소·한국역사연구회·역사문제연구소·역사학연구소가 ‘유신’ 40돌을 맞아 공동 주최한 ‘역사가, 유신시대를 평하다’란 학술대회에서 ‘어느 농민의 생활세계와 유신체계’란 논문을 통해 신씨 일기를 공개하면서 이런 견해를 폈다.

신씨 등 농민들 일상 기록을 모은 <평택 대곡일기>(경기문화재단 간행)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유신체제의 농촌 지배방식을 들여다본 김 교수는 마을공동체를 활용한 또다른 강압적 지배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논문을 보면, 서울 유학 경험이 있던 신씨는 60년대 4·19혁명을 겪으며 민주주의 가치에 눈떴고, 5·16 쿠데타 소식을 듣고 “자리를 탐냄이 아닐까” 의혹을 품기도 했다. 민주주의와 국가, 민족 등의 가치에 관심 많았던 ‘새 농민’이었지만, 씨족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농촌에서 뜻대로 정치적 의사 표현을 하긴 쉽지 않았다. 집권층은 이를 활용해, 선거 때마다 동네 사람에게 술을 사서 표를 끌어모으라며 돈을 보내오는 등 ‘동원책’으로 그를 활용했다. 유신 선포 다음해인 73년 신씨는 이장을 맡았고, 이장 자리는 새마을 사업과 함께 더욱 그를 ‘동원과 포섭’의 시스템으로 밀어넣었다.

그럴수록 신씨의 ‘표리부동’은 심화됐다. 78년에는 총선을 앞두고 당에서 마을에 자금 공세를 하라며 2만원을 보내왔지만, 투표 당일 그는 “비위에 거실리여 지인의 장례식을 핑계로 투표소를 떠났다”고 한다. 일기에는 “집권당의 권력남용이 가시고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되길 우리 국민은 바랄 뿐”이라고 썼다. 76년부터 정부에서 강요한 신품종 벼를 심었다가 농사에 실패한 일은 그가 유신정권에 불신을 품게 된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김 교수는 “박정희와 유신체제에 대한 미화나 향수는 당시가 아닌 그 뒤에 만들어진 측면이 많다”며 “이걸 깨는 것이 오늘날의 과제”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이번 학술대회에선 유신정권과 친일파의 관계, 유신체제의 경제적 뼈대인 재벌중심 구조 등에 대한 심층 연구가 대거 발표됐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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