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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정치가 뭐냐면…적과 동지 구별하는 것

등록 2012-10-26 20:23

카를 슈미트(사진·1888~1984)
카를 슈미트(사진·1888~1984)
나치 ‘계관법학자’였던 슈미트
국가 본질을 정치에 두고 사유
중립물로 바라본 자유주의 비판
정치적인 것의 개념
카를 슈미트 지음, 김효전·정태호 옮김/살림·2만5000원

나치의 ‘계관법학자’였던 독일의 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사진·1888~1984)의 대표적인 저작인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 20년 만에 새로운 번역으로 다듬어져 나왔다.

슈미트가 학자로서 활발히 활동했던 1920~ 30년대 독일은 혼란의 시대였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 군주제 붕괴, 좌우 극단주의 세력과 주변 강대국의 압박 속에 무기력했던 바이마르공화국의 몰락, 나치즘의 대두와 같은 ‘험악한 사태’들을 끊임없이 겪었다. 이런 가운데서 그는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강한 권위를 가진 국가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길로 나아갔고, 결국 나치즘에 이론적·철학적 근거를 제공한 극우 보수주의 사상가가 됐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문제들은 악마적이리만큼 냉철한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어, 좌우를 막론하고 정치와 국가를 사유하고자 하는 후대 사상가들에게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정치의 본질을 적과 동지의 구별에서 찾는 과감한 발상, 주권자를 예외상태에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로 보는 새로운 관점, 자유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 등이 그러하다. 샹탈 무페, 조르조 아감벤, 에티엔 발리바르 등은 이런 슈미트의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대표적인 좌파 사상가들이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이란 명제인데, <정치적인 것의 개념>은 이 문제에 천착했기에 슈미트의 대표 저작으로 꼽히고 있다. 슈미트는 도덕적인 것에는 ‘선과 악’의 대립, 미학적인 것에는 ‘미와 추’의 대립이 그 본질적인 규준이 되듯,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의 구별과 대립을 그 본질로 삼는다고 봤다. “동지와 적이라는 특수한 대립을 다른 구별들로부터 분리시켜 독립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 속에 이미 정치적인 것의 존재로서의 사실성과 독립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적이란 사적인 경쟁 상대가 아니라 공적인 투쟁의 대상으로, 철저하게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존재다. 예컨대 산업 콘체른이나 노동조합은 경제적 기반에 근거한 인간의 결합이지만, 상대방을 실제의 적으로 다루고 그것과 투쟁하는 경우 정치적인 세력이 된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해, 이렇듯 투쟁하는 상대로서 적과 동지의 구별이 없다면 정치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정치적인 것에 대한 슈미트의 사유는 근본적으로 국가의 본질을 파고드는 작업이다. 그는 책의 첫머리에 “국가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전제로 한다”고 못박고, 끝머리에는 ‘인간적인 것들의 질서’라는 표현을 쓰며 “통합에서 질서는 생긴다”고 말한다. 적과 동지의 구별은 ‘예외상태’라 할 수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적과의 ‘전쟁’으로 나아가는 결정을 내릴 주권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이 곧 국가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또한 정치적 통일체인 국가는 모든 인간적인 것들의 질서 그 자체라고 본다.

슈미트는 당시 유럽을 휘감은 자유주의는 ‘적과 동지의 구별’이라는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부정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국가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자유주의가 만든 것은 권력의 배분과 균형, 곧 국가의 억제와 통제의 체계일 뿐이며 자유주의를 국가이론이나 정치적 구성원리로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를 ‘중립물’로 간주하고 국가의 제도들을 ‘안전판’으로 만들어버리는 자유주의적 사고 속에서 투쟁이라는 정치적 개념은 경제적 측면에서는 ‘경쟁’으로, 다른 한편의 정신적 측면에서는 ‘토론’으로 변질된다고 여겼다. 정치적인 것을 복원하는 것만이 자유주의의 요란한 탁상공론을 끝내고 진정한 공동체를 이뤄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책에 대한 주해를 쓴 미국 신보수주의의 대부 리오 스트라우스는 “홉스가 자유주의의 창시자라면,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긍정을 통해 자유주의 안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준비’해줬다”고 평가한다.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을 긍정하기 위해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서로에게 위험한 존재라고 본 홉스의 전제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런 전제에 따라 이를 다스릴 수 있는 지배를 필연적이라고 긍정한 것이다. 스트라우스는 이런 맥락에서 “슈미트의 자유주의 비판은 자유주의의 지평에서 수행됐으며, 그가 준비한, 자유주의를 대체할 체제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한 세기에 걸쳐 슈미트의 정치철학이 좌우파를 막론하고 끝없이 되새겨지는 맥락을 짐작하게 해주는 지적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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