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예언자-우리가 경제학자 슘페터에게 오해하고 있었던 모든 것
토머스 매크로 지음, 김형근·전석헌 옮김/글항아리·4만원
토머스 매크로 지음, 김형근·전석헌 옮김/글항아리·4만원
자본주의 본질 종합적 고찰 슘페터
체제 원동력 ‘기업가 정신’에서 찾아
경제·지성사 맥락서 그의 생애 정리 기업들은 자신들이 자본주의의 원리에 부합한다는 걸 드러내기 위해 ‘창조적 파괴’ ‘혁신’ ‘기업가 정신’과 같은 문구를 많이 쓴다. 그만큼 이 말들은 오늘날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의 이정표처럼 받아들여진다. 이 말들은 20세기를 대표하는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사진·1883~1950)로부터 왔다. 슘페터는 동갑내기 경제학자였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와의 라이벌 관계로 특히 주목받았고, 자신이 태어난 해에 죽은 카를 마르크스(1818~1883)와 자본주의 체제 분석에서 한편으론 비슷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견해를 펼치는 등 독특한 지적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슘페터와 그의 경제사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자본주의 자체를 분석하기 위한 필수적인 접근이 된다. 토머스 매크로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명예교수가 쓴 <혁신의 예언자>는 슘페터의 삶과 사상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전기다. 지은이는 서문에서 “그저 좁은 울타리 안에서 슘페터의 경제학적 소견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자본주의를 이해하고자 했던 숙명적 노력을 살펴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밝힌다. 곧 슘페터의 생애를 당대의 경제사·지성사의 맥락에서 담으려 했다는 것이다. 특히 헤겔이나 콩트·마르크스·베버 같은 선배들처럼, 경제학의 범주를 넘어서는 ‘박식가’, 종합적 지식인으로서의 슘페터 면모가 강조되어 있다.
슘페터는 자본주의는 기존의 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혁신으로 발전하는 체제이며, 그것을 수행하는 기업가 정신이 체제를 이끌어가는 주요 동력이라고 봤다. 오스트리아 태생인 그는 남편을 일찍 여읜 어머니 요한나의 적극적인 노력에 힘입어 빈의 귀족사회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빈대학에서 경제학 공부를 시작한 슘페터는 프리드리히 비저, 오이겐 뵘바베르크 등 이른바 ‘오스트리아 학파’의 전통 아래에서 지적으로 성장했지만, 그 대척점에 있었던 마르크스의 사상으로부터도 큰 영향을 받았다.
슘페터가 스물여덟살에 펴낸 첫 책 <경제 발전의 이론>은 지속적인 균형의 붕괴가 경제발전의 기초로 작용하는 것을 자본주의의 본질이라고 보고, 그 과정에서 혁신을 추구하는 기업가의 구실을 제시해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의 미래지향적인 성격을 품고 있는 ‘신용’의 중요성을 제기해 높은 평가를 얻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재무장관, 민간은행 은행장을 맡는 등 정계·재계에서 일했던 슘페터는 1925년 독일 본대학 교수가 되면서 다시 학계로 복귀했고, 1932년에는 미국 하버드대 교수로 부임했다. 자신의 학문을 깊이 파고들수록 슘페터는 역사에 초점을 맞췄다. <경기순환론>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 <경제 분석의 역사> 등 1930~1940년대에 쓴 대표 저작들은 이런 성격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 저작들을 통해 슘페터는 자본주의 체제가 가져다준 경제성장의 결과들을 역사적으로 들여다봤고, 경제구조 안에서 일어난 끊임없는 혁신·파괴·창조가 그 근본적인 요소이자 핵심이라는 ‘창조적 파괴’ 이론을 제기했다.
주저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점을 반박한 것이 대표적이다. 슘페터는 역사적인 사실을 돌이켜 볼 때, 노동자의 소득이 사회 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갈수록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늘어난다고 주장했다. 또 이런 관점은 자본주의가 하나 이상의 경제체제를 의미하며,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그 진화 과정을 고찰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발전해나갔다.
지은이는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948년 슘페터가 미국경제학회 연례회의에서 연설한 장면을 그의 인생 마지막 하이라이트처럼 다뤘다. 그 자리에서 슘페터는 애덤 스미스, 마르크스, 케인스의 사례를 들며 경제학자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경제학자들이 주관적 편견이 지나친 나머지 경제학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날선 비판이었다. 그런 한편 역설적으로 “이데올로기 없이 우리는 전진할 수 없을 것”이라며 이데올로기의 불가피성을 지적하고, 이를 학문을 위한 동기로 활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은이는 “경제학자와 일반 시민 모두 스미스의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로 생각하는 데 길들여져 있었고, 이런 이분법적 대립의 절충안이 케인스주의였다”고 당시 경제학의 상황을 얘기한다. 이런 상황 설명에는 슘페터가 이념적으로 어느 쪽에 속한다기보다 자신의 길에 충실한 학자였다는 평가가 담겨 있다. 에필로그에서는 “슘페터는 절대로 편협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경제학자의 테두리를 넘어서 있었다”고도 했다. 몇 마디 말로 슘페터의 학문을 압축해 넣을 것이 아니라, 그가 벌인 학문적 고투의 세세한 내용들을 되새겨야 한다는 걸 강조하는 말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사진 글항아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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