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국가-유대인 문제의 현대적 해결 시도>
테오도르 헤르츨 지음, 이신철 옮김/도서출판b·1만1000원
<유대 국가-유대인 문제의 현대적 해결 시도>
테오도르 헤르츨 지음, 이신철 옮김/도서출판b·1만1000원
테오도르 헤르츨 지음, 이신철 옮김/도서출판b·1만1000원
이스라엘 건국 밑그림 그린 헤르츨
드레퓌스 사건서 유대인 증오 목도
시온주의 운동 벌이며 독립국가 꿈 최근 세계의 촉각을 곤두세우게 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교전은 150여명의 희생자를 남긴 채 8일 만에 휴전이 성립됐다. 그러나 이 불안한 휴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끊임없는 전쟁으로 몸살을 앓아온 팔레스타인 분쟁은 인류가 피와 증오로 쓰인 역사 위에 평화의 씨앗을 틔울 수 있을지를 묻는 시험지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 벌여온 ‘현대적’ 분쟁의 기원으로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꼽을 수 있다. 전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서구 열강과 교감하며 여기에 정착했고, 이미 오랫동안 삶의 터전을 다져왔던 이슬람 세력 등 다른 민족·종교에 속한 사람들과 갈등을 빚게 만드는 씨앗이 된 것이다. ‘정치적 시온주의’의 창시자라 불리는 테오도르 헤르츨(1860~1904)이 쓴 <유대 국가>는 ‘유대 국가’ 건설의 필요성과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기해, 이스라엘 건국의 토대를 닦은 책으로 평가받는다. 오늘날 ‘중동분쟁’의 근대적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는 텍스트다. 특히 이 책은 유대 국가 건설의 필요성이 유럽에서 기승을 부리던 반유대주의에 대한 대응으로부터 제기됐다는 사실 등을 통해 중동 문제의 원초적 뿌리는 유럽 사회 내부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헤르츨은 헝가리의 유복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 빈에서 저널리스트·문학비평가로 활동했다. 유럽 사회에 ‘동화된’ 유대인으로서 살 수 있었던 그가 시온주의자로 거듭난 결정적 계기는, 1895년 프랑스 파리 특파원으로 취재했던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독일 간첩 누명을 쓴 유대인 장교에게 쏟아지는 파리 군중들의 증오와 반유대주의를 대면한 그는 이른바 ‘유대인 문제’를 풀기 위한 실질적 방법은 오직 ‘국가 건설’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게토’와 같은 유대인 격리 정책에서 보듯 유대인은 사는 곳 어디에서나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헤르츨은 이전 시대의 종교적인 ‘유대인 증오’와 당시 ‘반유대주의’를 구분한다. 그는 반유대주의에 대해 “서구의 문화 민족들은 보편적 인간성에 근거해 법률적 평등권을 부여하는 등 유대인을 해방시켰는데, 부르주아지로 성장한 유대인들에게 맞설 수 없는 이러한 불가능성으로 인해 오히려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강화되고 지독해지고 있다”고 풀이한다. 그는 ‘동화’의 가능성을 부인한다. 따라서 유일한 해결 방법은 유대인들의 민족적 요구를 충족시켜줄 ‘새로운 주권’의 탄생이다. 그는 이런 해법이 동화할 수 없는 유대인과 감당하기 힘든 반유대주의의 부작용들을 감당해야 하는 서구 다른 민족들한테도 실질적인 이득이 된다고 강조한다. 때문에 헤르츨이 제시하는 유대 국가 건설론은 서구 열강의 지지를 받는 데에서 출발한다. 헤르츨은 ‘유대인 회사’를 통해 대규모 이주를 위한 경제적 기틀을 다지며 ‘유대인 협회’를 만들어 열강으로부터 ‘국가 형성적 권력’으로 인정받는 큰 밑그림을 제시하고, 재산의 청산과 분배, 새로운 시장과 산업의 조직 등 구체적인 구상을 전개해 나간다. 시온주의란 말은 이전부터 유대교 지도자인 정통파 랍비들이 종교적 관점에서 썼던 말이다. 이미 1883년께 많은 러시아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이민을 가기도 했다. 헤르츨은 여기에 ‘정치적 비전과 실천’을 불어넣었다.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최초의 시온주의자 회의를 주도하고 독일 빌헬름 2세와 투르크 술탄을 만나 교섭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하다 44살에 세상을 떠난다. 그가 토대를 닦은 정치적 시온주의 운동은 결국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이란 과업을 완수한다. ‘헤르츨은 유대인과 아랍인이 공존하는 나라를 꿈꿨다’는 평가도 있지만, 책 속에선 그런 비전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유대 국가 건설 후보지로 팔레스타인을 언급하며, “유럽을 위해 우리는 거기서 아시아에 대항한 장벽의 한 부분을 형성할 것이며, 야만에 대항한 문화의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유대인 대량이주에 따른 유럽 사회 내부 문제는 세심하게 고민하면서도, 그들이 정착할 땅에 살아온 아랍인들에 대한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건국과 중동 문제가 애초부터 얼마나 깊숙이 ‘유럽 문제’에 뿌리를 대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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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 사건서 유대인 증오 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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