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형 기자
울림과 스밈
지난 4일 전 세계의 저명한 학자·작가 160여명이 연대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은 위르겐 하버마스, 울리히 벡, 악셀 호네트, 주디스 버틀러, 페터 슬로터다이크 등 현대 인문사회과학 발전사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쟁쟁한’ 대가들이었다. 뜻밖에도 이들은 한 독일 출판사의 존립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 경영진 사이 분쟁이 법적 소송으로까지 번져 최근 독일 사회 안팎의 이목을 집중시켜온 주어캄프 출판사의 문제(<한겨레> 1월3일치 24면)였다.
‘주어캄프 문화’라는 말을 만들어 낼 정도로 전후 독일의 정신적 기둥 구실을 했던 이 출판사는 타계한 전임 발행인의 부인인 현재의 발행인인 울라 운젤트 베르케비츠와 지분의 39%를 가진 기업가 주주 한스 발라흐 사이의 분쟁으로 ‘해체’ 위기를 겪고 있다. 옛 경영진의 부진한 실적, 본거지 프랑크푸르트로부터 베를린으로의 본사 이전 등 다양한 이유가 분쟁의 씨앗으로 거론된다.
이런 가운데 나온 이번 성명은 이 출판사 ‘인문사회과학 부문’에서 책을 낸 작가들이 중심이 돼 어느 한 쪽 편을 들기보단 분쟁 자체에 반기를 들면서 “이성과 책임의식”에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그동안 페터 한트케 같은 ‘문학부문’ 작가들이 주로 한스 발라흐의 시장주의 경영을 우려하면서 기존 경영진 베르케비츠의 편을 들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목소리다. 성명 내용을 보면, 이들은 “독일의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을 발전시켜온 가장 중요한 매체 가운데 하나인 주어캄프 출판사의 현상황, 특히 두 진영으로 나뉘어 법적 분쟁이라는 적합하지 않은 수단으로 갈등을 해소하려는 상황을 깊이 우려한다”고 밝히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이들은 자신들이 ‘주어캄프 문화’ 그 자체의 편임을 강조한 셈이다. 이들은 성명에서 이 출판사가 “이익 창출을 최고 지표로 삼지 않고, 사고의 경계를 넘나드는 비판적 담론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또 분쟁 당사자 모두에 대해 “주어캄프라는 독창적 업적을 두고 섣부른 도박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하며, ‘중재’에 기대를 건다고 밝혔다.
페터 주어캄프가 세운 출판사가 명기획자 지크프리트 운젤트와 만나 ‘주어캄프 문화’를 일으켜 세웠던 ‘아름다운 옛 이야기’는 이제 질척한 법정소송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러나 이번 연대성명에서 보듯, 하버마스와 호네트 같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입을 모아 “지키자”고 호소할 수 있는 이 출판사의 문화적·정신적 유산은 질척거리는 현실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과연 우리도 이런 문화적·정신적 유산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독자들이 ‘좋은 책’보다 ‘싼 책’을 찾고 출판 관계자들이 문화보다 수익을 최고 지표로 삼는 한 그 어떤 가능성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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