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비릴리오(81)
정치철학자·건축가 폴 비릴리오
테크놀로지와 인간의 삶에 천착
“속도는 사물 출현의 핵심 동력”
테크놀로지와 인간의 삶에 천착
“속도는 사물 출현의 핵심 동력”
이안 제임스 지음, 홍영경 옮김/앨피·1만5000원 정치철학자·건축가·도시계획가·전쟁학자·문화비평가 등 수많은 얼굴을 지닌 프랑스 사상가 폴 비릴리오(81·사진)는 ‘21세기 서구 지성계의 카산드라’로도 불린다. 모든 이들에게 외면당한 그리스 신화의 예언녀 카산드라처럼, 그는 ‘속도’라는 독창적 개념을 통해 현대 문명에 대한 예언자적 사유를 일찌감치 내놓았지만, 주요 저작들은 한참 뒤에야 새롭게 조명받았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 출간된 <속도의 사상가 폴 비릴리오>는 인문학 분야 석학들의 이론을 간결하게 정리해주는 영국 루틀리지 출판사의 ‘크리티컬 싱커스’ 시리즈 가운데 한 권이다. 주저로 꼽히는 <속도와 정치>를 비롯해 <전쟁과 영화> <소멸의 미학> <동력의 기술> <정보과학의 폭탄> 등 그의 저작들은 2000년대에 들어 국내에서도 많이 소개된 바 있다. 이 책은 광범위한 영역을 넘나들며 새로운 개념들을 종횡무진 펼쳐내는 비릴리오 사상의 주된 줄기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 안내서다. 프랑스 철학·문학 연구자인 지은이는 “비릴리오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사상가인 것은 아마도 그의 저작이 테크놀로지 문제에 대한 철학의 지속적 관여에 뿌리를 두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서구 역사에서 테크놀로지는 주로 일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곤 했다. 이와 달리 비릴리오는 테크놀로지가 사회·정치·문화·예술을 아우르는 인간의 전체 삶과 맺고 있는 깊은 관계에 천착한다. 애초 건축학자로서 도시 계획 등에 관심을 가졌던 경력도 이런 사유를 뒷받침한다. 비릴리오 사상의 배경에는 “테크놀로지의 형태가 사회 형태를 촉발한다”고 봤던 발터 베냐민(1892~1940)의 문제의식과 세계를 파악하는 통로로서 감각·지각의 중요성을 일깨운 에드문트 후설(1859~1938)의 현상학을 찾아낼 수 있다. 또 인간은 어떤 대상을 어떤 배경 속에서만 감각하고 경험할 수 있다고 본 20세기 초 ‘게슈탈트 심리학’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단적으로 말해 비릴리오는 인간의 신체가 물리적·기술적 환경에 놓일 때 지각이 구조화되는 방식에 관심이 있었고, 그런 관심 속에서 세계에 대한 상투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것을 새롭게 지각하는 것을 추구했다고 책에서는 설명한다. 스스로의 사고체계를 ‘질주학’(dromology)이라고 했듯, ‘속도’는 비릴리오 사상의 핵심 개념이다. “비릴리오는 사회적·정치적·군사적 공간이 그 근본 수준에서 운동 벡터와 이 운동 벡터를 달성하는 전송 속도로 형성된다는 점을 먼저 깨닫지 못하면 사회사나 정치사, 군대사의 진실에 올바르게 다가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비릴리오에게 속도는 단지 물리적 운동의 빠르기 자체가 아니라, 사물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거나 제한하는 핵심 동력이다. 예컨대 인터넷의 발달로 가능해진 원격 실시간 통신과 비행기와 같은 탈것의 발달로 실현된 고속 운송은 서로 다른 차원의 능력인 것 같지만, 가속을 통해 우리와 사물의 시공간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는다는 점에서 다 같은 ‘속도기계’다. 이처럼 비릴리오는 속도 개념을 토대 삼아 정치·전쟁·예술 등 현대 세계의 다양한 면모들을 독창적으로 풀이하고 있다. 여태껏 세계는 속도를 갈수록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는데, 더는 가속할 수 없는 지점까지 도달하면 어떻게 될 것이냐가 그의 주된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현대 테크놀로지가 가져다준 전송·통신 속도의 가속화가 즉각적인 ‘눈앞의 존재’(presence) 대신 가상·원격에 대한 감각을 부추기고 공간에 바탕한 체화된 체험을 축소한다고 비판한다. 20세기 예술에서 나타나는 형태의 해체, 추상화 등은 바로 그런 추세를 반영한다는 게 비릴리오의 통찰이다. 정치적 맥락의 분석도 날카롭다. 비릴리오는 현대 운송 및 통신에서 거리를 폐기해온 가속의 문제가 현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속성의 변화와 세계화 진전에 영향을 줬다고 본다. 속도의 발달이 영토지정학에 뿌리를 둔 ‘공간 차원’의 정치를 밀어내고, 실시간 정보 교환, 시장 활동, 세계적 자본 이동의 관리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시간 차원’의 정치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또 이런 시간정치의 발흥은 신자유주의 경제학과 최소국가주의 정치학을 밑받침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지은이는 “비릴리오의 사상은 앞으로 다가올 인류의 운명이 어떤 것일지 근본적으로 재사유하는 방식을 제안한다”고 말한다. 질주학으로 대표되는 비릴리오의 독창적 사상은 지난 20~30년 동안 인간 사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진단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새로운 고민도 가능케 할 것이라는 평가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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