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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복지국가 담론, 재분배에만 초점…경제민주화와 직결 안돼”

등록 2013-02-19 20:15

새 길을 여는 한국의 인문학자들
⑦ 영국 노동당사 연구 정치학자 고세훈
흔히 사회과학은 구조와 제도에만 관심을 쏟는다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사회과학을 인문학에서 떨어뜨려놓은 것은 학문 편제의 편의를 위한 것일 뿐, 사회과학의 주된 관심사 역시 결국엔 인간 그 자체로 향한다.

19일 정치학자인 고세훈(58) 고려대 교수의 서울 방배동 집을 찾았다. 고 교수는 영국 노동당 정치에 대한 전문가로서, ‘반복지’ 주장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국내에서 복지국가 담론을 주도해왔다. 그의 집 마루에 있는 서가엔 전공 서적 말고도 문학 책들이 잔뜩 꽂혀 있었다. 미국 작가 존 그리셤의 소설집, 스웨덴 작가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따위의 장르문학 책들도 눈에 띄었다. 그는 “사람, 특히 구체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아서 그렇다”며 “사회과학자라면 아마추어 인문학자가, 인문학자라면 아마추어 사회과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고세훈 고려대 교수가 14일 오후 서울 방배동 집에서 집필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영국정치와 복지국가 연구에 매진해온 그는 유난히 인물과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고세훈 고려대 교수가 14일 오후 서울 방배동 집에서 집필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영국정치와 복지국가 연구에 매진해온 그는 유난히 인물과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고 교수는 제도나 정책뿐 아니라 역사와 인물에도 관심이 많다. 그동안 펴낸 저작과 번역서들을 봐도 이런 면모가 두드러진다. 대표작인 <영국노동당사>에서 그는 노동계급을 정치의 주역으로 등장시킨 영국 노동당의 고되지만 빛나는 ‘역사’를 담았다. 그가 우리말로 옮긴 로버트 스키델스키의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경제학의 새 길을 닦은 한 ‘인물’을 탐구한 책이다. 최근에 내놓은 저작 <조지 오웰>은 지식인의 이상적 표상이라 할 수 있는 오웰의 삶과 사상에 대한 보고서다.

“인간은 스스로 윤리적으로 살 수 없다는 점에서 근원적인 비극성을 안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윤리적 삶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할 순 없죠. 인류의 삶에는 이런 인간의 비극성을 유예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생각을 주목하고 드러내고 싶습니다. 희망이란 의무이자 당위니까요.”

제도가 중요한 것은 사람의 안위와 복지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인데, 제도와 구조를 만드는 것 또한 사람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람의 구체적인 삶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는 것이다.

그가 국내에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영국의 경제사가 리처드 헨리 토니(1880~1962)의 저작들을 번역해 국내에 소개하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고 교수는 토니의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을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비교하는 등 토니의 삶과 사상, 정치 활동을 본격적으로 다룬 저작도 써낼 계획이다. 토니는 영국 복지국가의 기틀을 닦은 사회주의·민주주의 사상가다. 자본주의 폐해를 극복하고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제도적 해법을 모색했던 인물이다. 고 교수는 토니의 사상뿐 아니라 그가 자신의 생각을 삶 속에서 일관되게 실천했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기업의 지배구조 개편 중심에 둔
경제민주화가 복지국가 목표돼야”

영국의 복지 토대 닦은 지식인은
약자들 고통에 연대하는 삶 실천
한국은 신자유주의 담론에 억눌려
정치엘리트들 중장기적 전망 잃어
지식을 사회적 재산으로 안 본 탓

“약자들의 고통에 대한 깊은 연민, 구조와 체제에 대한 분노,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약자들과 연대했던 실천 등 그의 삶은 그의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제도와 체제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이런 ‘인간’을 배워야 합니다.”

토니뿐 아니라 시드니 웹, 조지 버나드 쇼, 토니 벤, 랠프 밀리밴드 등 수많은 지식인들이 영국의 노동정치와 복지국가 건설에 몸을 던졌다. 궁극적으로 고 교수는 이들 가운데 20여명을 꼽아 ‘인물 중심으로 보는 영국 노동운동사’를 펴내는 것이 또 하나의 목표라고 한다. 왜 이토록 ‘인물’에 집착하는 것일까? 한국 사회, 특히 진보의 문제가 ‘지식인’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라 한다. 그는 “압도적인 신자유주의 담론에 눌려버린 지식인, 정치 엘리트들이 제구실을 못하고 중장기적인 전망마저 잃어버렸다”고 우리 현실을 진단했다. 지식인들이 지식을 사회적 재산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의 노력에 대한 보상 체계로 보고 있다는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서유럽 국가들과 다르게 한국에서는 보수파의 온정주의적 전통도 없고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권력자원도 없습니다. 민주주의란 힘에 대한 ‘상쇄력’을 키울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인데, 그것을 기대할 수 없는 환경인 거죠. 이 공백을 메워줄 사람이 무척 중요합니다.”

고 교수는 우리 시대의 ‘거대 담론’이 어느 곳을 향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나름의 비전을 제시했다. 복지국가 전문가로서 최근 뜨겁게 주목받았던 복지국가 관련 담론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고 했다. 재분배에만 초점을 맞췄을 뿐 ‘경제민주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한 탓이라는 비판이었다. 특히 ‘생산의 민주주의’, 곧 기업의 지배구조 개편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민주화’가 복지국가 건설의 주된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갤브레이스조차도 ‘기업을 통제하지 않고선 자본주의의 미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해관계자의 목소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생산현장이 국가 복지를 가로막고 불평등을 양산하는 현상을 지적한 것입니다. 경쟁을 긍정하고 소유권 행사를 절대시하는 자유주의 이념으론 이런 벽을 뛰어넘기 힘듭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새로운 거대 담론이 필요한 이유죠.”

은퇴 뒤에는 전공의 제약에서 벗어나 ‘비극적 인간’을 주제로 글을 써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세익스피어 희곡, 성경 등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근원적 비극성을 철저하게 파헤쳐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인간이 ‘외부’로부터 구원을 찾아낼 수 있는가 탐구하는 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끝>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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