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영국 평민원의 모습. 의장을 바라보고 왼쪽이 여당, 오른쪽이 야당이다. 한길사 제공
이태숙 지음/한길사·3만원 “역사적 지혜의 축적” 헌법 옹호하며
‘인권유린’ 등 체제 부당성 비판 막아
영국헌정 둘러싼 사상가 논쟁 집대성 프랑스·미국과 함께 근현대 민주주의의 길을 닦았던 영국 정치체제의 역사는 여러모로 남다른 특징이 있다. 오랫동안 지켜온 의회제 전통을 바탕에 두고 온갖 사회세력과 담론들이 장기간 쟁투를 벌였던 것이다. 특히 문서화한 공식 헌법이 없었기에, ‘유연성과 적응력을 발휘해왔다’는 칭찬을 받지만 다른 한편으론 ‘헌정의 불확정성이 높다’는 비판을 받았다. 서양사학자인 이태숙 경희대 교수가 쓴 <근대영국헌정-역사와 담론>은 근대 영국 헌정사에 나타났던 주요 논쟁들을 파헤친 저작이다. 그들 스스로 ‘명예혁명’이라고 자부심을 담아 칭송했던 영국 헌정사의 밝은 면뿐 아니라 내부에서 제기된 비판들을 근거 삼아 어두운 면까지 상세히 분석했다. 17세기 내전부터 20세기 대처리즘 지배까지 영국에서 민주주의와 관련된 온갖 담론들이 어떻게 분출했는지 보여주는 셈이다. 이 책은 근대 영국 헌정에 대한 사상가들의 견해를 통해 정치체제와 관련된 ‘보수주의’가 어떻게 발현되고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1688년 명예혁명과 ‘권리장전’ 선포에 대한 지배적 해석은 말 그대로 “명예로운” 영국 고유의 혁명 유산이라는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 사상가 월터 배젓(1826~1877), 헌법학자 앨버트 다이시(1835~1922)에 이르기까지 “영국헌법에 관한 대표적인 해설들은 상당히 보수적 시각의 산물이며 다분히 칭송의 성격을 띠었다.” 눈여겨볼 대목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당시 영국 지식인들이 벌였던 논쟁, 이른바 ‘팸플릿 전쟁’이다. ‘보수주의’의 대표선수였던 에드먼드 버크(1729~1797)는 1790년 펴낸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프랑스 국민의회를 모범 삼아 의회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을 비판했다. 그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이론·이념을 배격하고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것을 자유의 기준으로 삼아” ‘보수주의’를 헌정원리로 내세웠다. 지금 체제는 역사를 통해 확립된 지혜의 축적이므로 변혁해선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우리의 행복한 상태는 우리의 헌정에서 기인한다”며 당시 자국의 번영을 사례로 끌어들였다. 버크의 담론에 맞선 이들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와 토머스 페인(1737~1809)이었다. 당시 영국의 문제점들을 지적한 울스턴크래프트는 영국 헌법을 “잡동사니”로 취급했고, 페인은 “영국에 헌법이라고 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공화제를 추구하는 새 헌법을 제정하자고 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병사징발제, 형법, 사냥법 같은 인권유린 제도를 고발해 체제의 부당성을 드러냈고, 페인은 왕-내각-의회가 기득권 연맹으로 결속된 현실을 까발렸다. 그러나 이 논쟁의 실질적 승자는 버크였고, 버크에 의해 정초된 영국 헌정에 대한 보수주의적 담론은 그 뒤로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버크의 보수주의를 지은이는 냉정하게 비판하는 쪽이다. “영국 헌정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접근 자체를 차단했다”고 본 것이다. 또한 “지금의 헌정체제가 안정과 번영과 같은 실제 이득과 결부된다는 역사적 공리주의와 영국 국민의 독특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는 국수주의를 뻔뻔할 정도로 동원했다”고 꼬집는다. 게다가 버크는 이전의 미국 혁명에 대해서는 상반된 논리로 우호적인 입장을 보여 논지를 일관성 있게 추구하지도 못했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보수주의는 언제나 호소력을 지니며 채택될 수 있는 가치체계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영국 헌정에 무한한 칭송을 바쳤던 배젓은 기존 제도에 대한 적극적 인식을 표방하며 버크의 고전적 보수주의의 약점을 극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기존 제도의 ‘좋은 점’을 유지하겠다는 접근은 필수적으로 ‘나쁜 점’은 버려야 한다는 제도 비판을 수반하게 된다. 1980년대 등장한 대처 정부는 극단적인 자가당착의 사례로 볼 수 있다. 헌정 전통을 유지·보수하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과격한 정치의제를 추진하면서 헌법적 관행을 무시했다. 오히려 노동당 중심의 야당세력이 헌정개혁에 합의를 보게 하는 데 도움을 줬던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 제도 유지를 항상적으로 주장하는 보수주의가 성립할 수 있는가? ‘문명의 충돌’을 주장한 새뮤얼 헌팅턴(1927~2008)은 역설적인 답을 내놓은 바 있다. “기존 체제를 보수하려는 보수주의자들은 ‘체제에 대한 위협’을 드러내 강조하는 것을 전략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이는 보수·유지해야 할 전통과 제도 자체를 갖지 못한 한국 보수주의가 극단적으로 채용하고 있는 전략이기도 하다. 한국 보수주의가 붙든 단 하나의 생명줄은 결국 ‘북한의 위협’이 아닌가? 근대 영국 헌정사에서 ‘행복’ ‘안정’ ‘번영’ ‘국민의 우월성’처럼 한국 현실 정치에서 자주 튀어나오는 낱말들을 접하는 느낌도 새롭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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