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콜라가 2009년 내놓은 친환경용기(플랜트보틀)에 대한 광고들. 코카콜라는 매년 5800억개의 병을 파는데, 2010년까지 2년간 만든 플랜트보틀은 20억개에 불과했다. 마티 제공
일레인 글레이저 지음, 최봉실 옮김
마티·1만6000원 “이데올로기는 끝났다” 내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은 1960년 대니얼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래 보수주의자들의 단골 발언 메뉴다. <겟 리얼>의 지은이인 영국의 저널리스트 일레인 글레이저는 “이데올로기는 죽었다거나 이데올로기는 악이라는 말 자체가 가장 이데올로기적인 주장”이라며 “이데올로기가 감추고 있는 게임의 규칙 첫 번째가 이데올로기 없음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21세기 들어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 그것들은 단순히 정치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넘어 노동에서 여가활동, 음식에서 섹스까지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 침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현대사회 이데올로기의 특징은 각종 광고, 마케팅, 홍보 등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들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착취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시민들은 자신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소비자들은 기업들이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현대 정치의 유행어는 ‘진정성’, ‘새로운 정치’, ‘시민의 힘’, ‘풀뿌리 혁명’, ‘소통’ 같은 것들이다. 영국 보수당 당수인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이튼스쿨(영국의 최고급 사립학교)과 옥스퍼드대를 나온 귀족 출신이다. 하지만 캐머런은 2009년 선거유세 때 “거리의 남녀노소에게 권력을 재분배해 실제 국민이 권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밤새 제과점원, 맥주 제조공, 어부 등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연출한다. 출신계급 논쟁은 “사람들은 당신이 어디에서 왔는지(출신)가 아니라,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진다”며 피해갔다. 그가 정권을 잡은 뒤 실제 한 일은 재정 건전성을 빌미로 대학 등록금을 세배로 올리고, 영국 복지정책의 상징 격인 무상 국민의료보험(NHS)을 약화시키는 정책이었다. 이에 반발하는 대학생들의 시위는 무력으로 진압했는데, 방송들은 학생들이 창문을 깨트리는 장면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캐머런 내각의 대부분은 사립학교 출신에 백만장자 수준의 부자들로 채워졌다. 지은이는 “나는 정치가들이 진정성이나 겸손으로 위장하기보다는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들을 강력히 주장해주길 바란다”고 말한다. 음식·섹스 등 모든 일상에 침투
속고 있다는 사실 의식 못해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맞서야 기업들의 전략은 더욱 교묘하다. 마케팅 전문가 어니스트 디히터는 이미 1960년 <욕망의 전략>에서 ‘어떻게 주부들이 인스턴트 케이크 믹스를 죄의식 없이 구입하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고민한다. 답은 ‘계란을 넣어라’였다. 최근에는 게릴라 마케팅, 입소문, 온라인 버즈, 참여마케팅 등 소비자들에게 ‘존중받고 있다’는 환상을 불어넣은 뒤 물건을 팔아먹으려는 기업들의 기법이 날로 진화하고 있다. 그들은 “대중이 세상사를 가장 잘 안다”고 말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물론 사람들이 점점 더 멍청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환영을 알아채는 시민들의 평균적인 능력은 상당히 날카로워졌다. 단지 환영을 조작하는 일이 더 잘 조직되고 향상되었을 뿐이다.” 환경문제에서도 이런 조작은 만연해 있다. 기업들은 환경 파괴를 감추기 위해 ‘친환경주의’로 자신들을 포장한다. 이른바 ‘그린워시’(가짜 환경주의)다. 석유회사는 대체에너지를 향한 자신들의 열정을 광고하고, 많은 연료를 소비하는 자동차가 북극곰과 함께 등장한다. 코카콜라는 2009년 기후변화회의에 맞춰 친환경 용기인 ‘플랜트보틀’을 출시하고 대대적인 광고를 내보냈다. 2010년 말까지 약 20억병의 플랜트보틀을 생산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는데, 코카콜라가 매년 판매하는 양은 5800억병이다. 기업들이 “걸핏하면 환경주의를 끌어들이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진정한 환경주의를 추구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워지고 있다.” 페미니즘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는 여성들의 위상을 포장하기 위한 반페미니즘에 이용당하고 있다. 화장품회사 로레알의 슬로건, ‘당신은 소중하니까요’에서 잘 드러난다. 보수주의는 모든 여성문제를 ‘선택’의 문제로 돌린다. 자신이 원하기 때문에 15㎝ 하이힐을 신고, 쇼핑 매장을 돌아다니고, 클럽에서 일한다는 식이다. “자유라는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삶이 수많은 암시에 의해 제약받고 있다는 사실을 흐리게 만든다. 여성이 자유롭다면 왜 우리 모두는 동일한 이상에 순응하려고 하는가? … 교육받은 여성이 온종일 자녀들 뒤치다꺼리하려고 일을 그만두면 선진국에서도 칭찬을 받는다.” 이외에도 ‘인터넷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환상, 텔레비전 리얼리티쇼의 비현실성, 사회생물학이나 진화심리학 같은 과학주의의 보수성, 음식문화의 계급성 등도 분석 대상이 된다. 지은이는 ‘은밀한 이데올로기’에 대항하기 위한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안한다. 먼저 이런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제대로 의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맞서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버리는 것은 이상주의, 즉 우리 세계를 개선하려는 비전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살고 싶은 세계를 공공연하게 말하고 토론하게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보수당도 당당하게 우익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다양한 영역의 구체 사례를 풍부하게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지만, 사례들이 영국 사회에 기반하고 있어 일부는 생소한 느낌을 줄 수도 있겠다. ‘겟 리얼’(Get Real)은 ‘현실을 똑바로 보라’는 뜻이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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