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 기자
최재봉의 문학풍경
소설가 성석제(45)씨가 동국대 교수직 제안을 거절했다는 소식이다. 성씨는 최근 이 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임용 통보를 받았지만 고심 끝에 지난달 24일 ‘포기 각서’를 제출했노라고 밝혔다.
성씨는 “전업작가라는 게 경제적으로도 취약하고 사회적 위치도 불안정하기 때문에 교수직이 보장하는 생활의 안정에 마음이 끌렸지만, 서류 제출과 면접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고민과 갈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결국 다시 가시밭길을 걷기로 한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시원섭섭하지만 함께 원서를 냈던 분들과 학교측에는 면목이 없다”고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새학기가 되면 대학들이 발표하는 신임 교원 명단에서 문인들의 이름을 심심치 않게 발견하게 된다. 특히 대학들이 앞다투어 문예창작학과를 신설하면서 문인들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실기의 중요성이 큰 문예창작학과의 특성상 실제 창작 경험과 성과가 있는 현직 문인들이야말로 교수로서 적임자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이런저런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교수 시인’ ‘교수 소설가’ 들을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문인들이 ‘장래’에 대비해 대학원에 다니는 것이 일종의 상식이 되었다.
시인은 말할 것도 없고 소설가들 역시 다른 직업이 없이 글쓰기에만 매달리는 ‘전업’인 경우 경제적 곤란과 생활의 불안정은 마땅히 각오해야 하는 ‘세금’과 같은 것이 되었다. 심지어는 원고료와 인세를 바라고 설익은 작품을 마구 쏟아냄으로써 작품의 질 하락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문학에 전념하겠다는 전업의 취지가 오히려 문학을 갉아먹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형편에서 대학 교수 자리는 매력적인 해결책으로 문인들에게 다가옴직하다: 안정적인 급여 덕분에 생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니 부실한 작품을 양산하거나 이런저런 잡문 또는 ‘매문’에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것이다; 교수직이라는 게 다른 직업과 달라서 자율성과 시간 여유를 넉넉히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재능 있는 학생들을 발굴해서 한국 문학의 동량으로 키워 내는 즐거움 또한 쏠쏠할 것이다; 여기에다 덤으로 사회적 지위와 명예까지!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낙관적이며 이상주의적인 기대일 뿐 현실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리포트와 성적 처리, 학사 관리를 비롯한 각종 잡무에 시달려야 하는데다 불요불급한 행사와 형식적인 모임에도 쫓아다녀야 하고 학생들은 기대했던 만큼 따라 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갈수록 대학들끼리의 경쟁이 심해지면서 학생 유치전에 동원되어 이름과 얼굴은 물론 발품까지 팔아야 하는 것이 교수 사회의 그늘진 현실이다. 가깝게는 박범신씨가, 멀리는 이청준씨와 이문열씨 같은 작가들이 ‘그 좋다는’ 교수직을 박차고 나온 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예술종합학교 교수로 가서도 문예지에 장편소설을 연재하며 ‘건재’를 과시하는 김영하씨 같은 경우도 있다.
교수가 될 것이냐 말 것이냐. 성석제씨의 표현처럼 이것은 확실히 양손에 떡을 들고 고민하는 형국과 흡사하다.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대신 <황해문화> 가을호에 실린 짧은 서평을 소개하고 싶다.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있는 김원우씨의 중편집 <젊은 천사>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경수(서강대 국문과 교수)씨가 쓴 글이다. 김원우씨의 책에 실린 두 중편은 모두 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등장시킨 작품으로, 직간접적으로 문예창작학과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서평자 김씨의 판단이다. 그는 소설가 김씨의 작품들이 “제도권 내에서 문예창작을 교수하는 일이 과연 온당한가 하는 의문을 암암리에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읽는다. 두 김씨의 소설과 서평은 문인들의 대학 교수행 러시의 좀 더 근원적인 측면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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